지역축제 포화시대, 지역성 담은 축제로 변해야 한다
9. 시민들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 가는 ‘라 메르세’

화려한 콘텐츠 보다 지역성 담아
자발적인 시민 참여가 축제 동력

▲바르셀로나시청 앞 광장에서 대형 인형극이 펼쳐져 시장 등 관계자들은 건물 베란다에서 관람하고 방문객들은 연신 핸드폰에 모습을 담고 있다.
▲바르셀로나시청 앞 광장에서 대형 인형극이 펼쳐져 시장 등 관계자들은 건물 베란다에서 관람하고 방문객들은 연신 핸드폰에 모습을 담고 있다.

매년 9월 바르셀로나는 대성당 앞 광장부터 고딕지구 골목골목까지 음악과 불꽃, 거대한 인형과 인간탑이 어우러진 축제의 열기로 가득 찬다. 

그 시작은 16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도시 전체가 위기를 맞자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자비의 성모 메르세에게 보호를 기원했고 기적처럼 재앙이 멈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성모 메르세는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후 1871년 바르셀로나시 정부가 9월 24일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고 제도화하면서 라 메르세는 도시 축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1902년을 기점으로 대형퍼레이드, 인간탑쌓기, 불의 행진, 거대 인형극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바르셀로나의 역사와 시민의 기억을 담아냈고 프랑코 독재 시기 카탈루냐어와 문화가 억압받을 때조차 라 메르세는 살아남아 까탈루냐 지역의 정신을 담아내는 대표적인 도시 축제로 자리잡게 됐다. 

올해도 라 메르세의 막은 시청 앞 산 자우메 광장에서 열렸다.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 사이로 4m에 달하는 거인 인형들이 나타나 전통 음악과 함께 움직이며 서사를 풀어내는 장면이 장관이다. 매년 주제를 바꿔 도시의 역사와 기억, 시민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개막 퍼포먼스에서 인형들은 마치 파티장에 초대된 것처럼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몸짓을 선보였다. 

바르셀로나시 관계자는 “라 메르세는 종교적 기원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그 뿌리는 시민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체성으로 발전했다”며 “이 축제의 소속감은 신앙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기념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이어 “라 메르세가 상징하는 것은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바르셀로나의 시민정신이다”며 “이 축제는 여전히 공동체 자부심의 원동력이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이 선보인 개막식 공연 모습.
▲주민들이 선보인 개막식 공연 모습.

카탈루냐 지역에서 열리는 축제에서는 인간탑 쌓기, 불의 행진, 거리전시 등 라 메르세에서 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겹친다. 하지만 라 메르세는 지역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계와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 메르세에서 큰 환호를 받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카스텔(Castell)’이다. 카탈루냐어로 ‘성채’를 뜻하는 인간탑 쌓기 행사는 2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통이다. 약 300~400명의 주민이 한 팀을 이뤄 15m가 넘는 탑을 쌓아 올리는 장면은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또 다른 명물은 ‘코레포크(Correfoc, 불의 행진)’다. 악마 복장을 한 사람들이 불꽃을 휘두르며 골목을 질주하는 퍼포먼스는 카탈루냐 중세의 민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과 소리, 군중의 함성이 뒤섞여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불꽃놀이가 된다.  

라 메르세의 가장 큰 특징은 화려한 콘텐츠가 아니다. 축제를 만들어가는 방식 자체가 ‘지역성’이 된다. 

거대인형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인형(Gegants)과 대두 탈 캐릭터(Capgrossos)는 시청에서 일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단위 협동조합과 문화단체들이 직접 관리하고 복원한다. 

실제 프로그램의 기획·운영은 지역 협회, 예술단체, 주민공동체가 맡고 시는 예산·안전·기술적 지원에 집중한다. 모든 주요 결정은 사전 협의와 협력과정을 거치며 예술적 방향에는 행정이 개입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시민단체 참여 프로그램이 100% 공공예산으로 지원된다는 점이다. 상업 후원이나 별도 모금 없이도 축제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다. 
 

아이들 참여 이끌며 세대 간 전승
매년 한 도시 초청해 문화교류도

▲인간탑을 형상화한 퍼레이드 행렬 모습.
▲인간탑을 형상화한 퍼레이드 행렬 모습.

또한 광장에서 인형극을 준비하는 사람들, 인간탑의 맨 아래를 받치는 사람들, 말춤(Cavallets Cotoners)과 북춤(Falcons) 등 전통 공연은 1년 내내 연습과 전승 활동을 이어가며 유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나 동호회를 통해 전통을 체험하고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이를 이어받는다. 새로운 세대가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전통을 이어가는 계승자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축제를 즐긴 관광객이 떠난 뒤에도 시민들은 다음 해를 준비한다. 수리를 마친 인형들은 전시장에 서 있고 아이들은 학교 수업에서 축제의 의미를 배우고 지역의 각종 문화 단체들은 다시 모여 다음 해 공연을 기획한다. 이러한 과정이 도시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로 작동된다. 

시민들이 단순히 즐기지 않고 책임감 있는 보존자로서 참여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꿀뚜라 비바 (Cultura Viva)’ 프로젝트다. 문화유산 단체, 청년단체, 자원봉사자 등이 협력해 ‘축제를 모두의 공동 자산으로 인식하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 프로젝트는 축제를 통해 시민의식을 키운다는 라 메르세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바르셀로나는 오버투어리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라 메르세는 여전히 ‘관광객을 위한 축제’가 아니라 ‘시민의 축제’로 남는다. 

그 비결은 분산형 무대 운영이다. 도심집중을 피하고 8개 구역 26개 장소에 공연과 전시를 배치한다. 이 방식은 지역 간 균형을 유지하면서 소음·혼잡 문제도 줄이는 효과를 낸다. 재활용 소재 사용, 플라스틱 제한, 공연 무대의 재생에너지 사용 등 환경 지속가능성 계획이 시행 중이다. 또한 폭염·폭우에 대비해 그늘막과 수분 공급 지점을 설치하고 일정 일부를 조정하는 등 기후위기 대응을 축제 설계 단계부터 반영하고 있다. 

2007년부터 도입된 ‘게스트 도시 (Guest City)’제도는 라 메르세를 세계도시 간 문화 교류의 장으로 확장시켰다. 2022년에는 이탈리아 로마 그리고 2023년에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키이우가 초청돼 각 도시의 문화예술단체들이 공연·전시·워크숍 등을 선보였다. 올해 게스트 도시는 영국의 맨체스터였다. 

라 메르세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형 축제 중 하나로 최근 몇 년 사이 축제를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가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시민이 주인이 되는 구조’ 덕분이다. 
 

▼공동취재단
해남신문 노영수 기자, 남해시대 전병권 기자, 담양곡성타임스 김고은 기자, 한산신문 박초여름 기자, 홍주신문 한기원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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