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봉태산 조선시대 봉수 위치
낙지·바지락·석화 등 수산물 풍부
해돋이 행사와 풍어제로 마을화합
100여 미터 남짓의 산이지만 조선시대 왜적이 침입하면 강진 남원포에서 봉수를 받아 송지면 갈두산에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산이 북일면에 있다. 이곳은 원동마을 뒤편에 위치한 봉태산으로, 예부터 주민들은 봉대산이라고 불렀다. 북일면 원동마을은 봉수가 위치했었다고 ‘봉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과거엔 강진군 백도면에 속했다가 지난 1913년 해남에 편입됐다. 지난 195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내동리가 원동마을과 내동마을로 나뉘었고 내동마을의 원류임을 알리기 위해 원(元)자를 붙였다.
북일면 원동마을은 53가구 7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 중으로 주낙 등을 활용한 낙지 잡이와 석화, 바지락, 꼬막 등 수산물 채취, 벼 재배와 마늘, 콩, 깨 등 농사를 병행하고 있다. 지금은 수온이 올라 재배하지 않지만 김 양식을 많이 하기도 했고 김해김씨 집성촌이라고 알려졌다.
마을주민 한경식(74) 씨는 “지금은 원동마을과 내동마을로 나뉘었지만 예전부터 내동마을하면 낙지로 알아줬다”며 “30여 년간 주낙으로 낙지를 잡아왔는데 60~70년대 최고 많이 잡힐 때는 이틀동안 103만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이는 지금 돈의 10배를 곱하면 얼마나 많은 수익이 났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홍문기(53) 씨는 “30여 년 전 경지 정리가 되기 전엔 마을회관 앞 일대 전부가 김 건조장이었을 정도로 80년대 중반까지 김 양식을 많이 했었다”며 “마을 앞 바다가 수심이 얕고 수온이 상승해 김을 키울 수가 없게 돼 김 양식을 하던 주민들이 화산면 사포리 등으로 대거 이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원동마을 뒷산인 봉태산(봉대산)에 위치한 봉수대는 일제강점기 모두 헐어내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도 주민들의 자부심이다.
이용안(81) 노인회장은 “코로나로 인해 지금은 하고 있지 않지만 최근까지 매년 1월 1일이면 온 마을 주민들이 봉대산 봉수대 자리에 올라 해돋이 행사를 하고 봉수대 앞 바위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리는 제사도 지냈다”며 “또 부녀회 중심으로 매년 음력 1월 15일이면 풍어제를 지냈는데 이 행사도 코로나 이후로 중단됐다”고 말했다. 이어 “주민들 화합 등을 위해 내년부터 다시 해돋이 행사를 마련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정동철(66) 씨는 “봉대산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의 놀이터로 친구들과 누가 산을 빨리 오르내리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다”며 “특히 봉대산 중턱의 노루샘 옆에는 번덕지(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야구와 비슷한 공놀이를 하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폐교된 산동분교(옛 산동국민학교) 2회 졸업생인데 한때 한 학년에 학생 수가 50~60명일 정도로 큰 학교였다”며 “특히 산동분교에서 고위직 공무원을 비롯한 고시합격자 등이 여러 명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마을 앞에는 북일면에서 가장 큰 섬인 ‘장죽도’가 있는데 하루 2번씩 썰물 때마다 바닷길이 열려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주민들 사이에선 질고(길다의 사투리) 크다해 ‘진대섬’이라고 불렸다. 또 마을 앞 소나무 방풍림은 150여 년 전부터 주민들이 직접 황토를 깔며 키워내 주민들의 자랑거리고 휴식처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나온 지하수도 물이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올해 처음으로 원동마을 이장을 맡은 전평환(72) 이장은 올해 94세가 된 어머니 강금례 씨를 모시기 위해 4년 전 대구에서 홀로 고향마을에 돌아온 효자로 칭찬이 자자하다.
전평환 이장은 “7남매의 장남이라 책임감을 갖고 고향마을로 왔는데 어머니는 ‘뭐하러 고생하는데 오냐’했지만 오길 잘한 것 같다”며 “어려서부터 마을 어르신들이 윗분들을 잘 모시는 것을 보고 배워 그대로 했을 뿐인데 칭찬까지 받아 몸둘바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이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2026년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마을 발전에 대한 고민이 많다”며 “봉대산 봉수대를 비롯해 마을의 옛것을 지키면서 신세대와 구세대가 화합하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