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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민주묘지(신묘역)가 자리잡은 곳은 흔히 망월동으로 알려졌으나 광주 북구 운정동이다. 5·18 희생자들이 처음 묻혔던 바로 옆 망월묘역(구묘역)도 수곡동이지만 인가가 있던 인근의 망월동 이름에서 따 불리고 있다. 이곳을 경유하는 시내버스 518번은 출발지와 권역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특별번호로 정해졌다. 비슷한 연유의 노선버스는 4·19혁명을 주도한 광주고를 지나는 419번, 무등산 해발 고도를 상징하는 1187번이 있다.

5·18 희생자들은 구묘역에서 17년간 잠들다 지금의 신묘역으로 이장돼 26년의 세월이 다시 흘렀다. 80년 5·18이 어느새 43년을 맞은 것이다. 이달 말까지 펼쳐지는 기념행사의 주제는 '오월의 정신을, 오늘의 정의로!'이다. 시민공모를 통해 선정된 주제는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희생했던 5·18 정신을 이어받아 정의로운 오늘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남에서도 기념식과 문화제가 열렸다.

그럼에도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5·18은 여전히 '누가 왜 쏘았고(발포 명령)', '몇 명이 어떻게 죽었는지(희생자)', '죽은 자는 어디서 잠들어 있는지(암매장)'를 가리는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도 미완으로 남아있다. 헌법 수록은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왜곡 발언을 청산하는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며 여전히 '광주사태'로 폄하하기도 한다.

해남에는 5·18 당시 사상자가 속출하거나 항쟁의 현장인 사적지(전남도 지정) 6곳이 있다. 우슬재 잔디공원, 상등리 국도변, 대흥사 여관 터, 해남중학교, 해남군민광장 그리고 주먹밥 나눔의 해남읍교회이다. 그동안의 증언을 모아보면 해남에서는 80년 5월 21일부터 사흘간 주로 상등리 국도변과 우슬재에서 군인들의 발포가 있었고, 해남읍 백야리 군부대 인근 야산에서 여러 구의 시신이 목격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집단발포로 7명 이상이 희생됐고 암매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증언의 일부나마 사실인 것으로 생각되는 유골 발굴이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가 지난 15일 백야리 예비군훈련장 인근 야산에서 암매장으로 추정된 3구의 유해를 찾은 것이다. 발굴된 유골이 해남에서 집단발포로 희생됐는지, 다른 지역에서 희생돼 옮겨왔는지, 아니면 관련이 없는지는 아직 모른다. 조사위는 이들 유해에서 총상 흔적 유무와 DNA(유전자) 추출을 통한 신원확인 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뒤늦게나마 그날의 진상에 접근하는 실마리를 찾아 다행으로 다가온다.

5·18 추모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에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구절이 있다. 5·18 2년 후에 만들어진 이 민중가요는 먼저 죽은 희생자가 '산 자'에게 남기는 비장한 주문을 담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잘못된 과거를 잊지 말고 되풀이하지 말자는 경구이다.

'5월 그날'이 43번째를 맞았다. 그날의 학살 '수괴'로 1년 반 전에 떠난 전두환이 저세상에서 5월 영령을 만나 사죄했는지 모른다. 이젠 남는 자들이 용서하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용서는 그날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명명백백 밝혀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실체적 진실을 모른 채 하는 용서는 허공에 뜬 말 잔치에 다름 아닌 때문이다. 진상이 하루빨리 규명되고 진정한 반성과 용서가 이뤄지는 '또 다른 그날'이 찾아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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