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바위에서 마을 이름 유래

이 마을을 육일시에서 북쪽으로 1km를 가면 도로변에 위치한다. 20여년전에는 28호에 이른 적이 있었으나,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12호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이렇게 동민이 적다보니 상호간에 다투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다. ¨시집온지 50년이 넘지만 서로간에 다툰 것을 본적이 없지라¨고 주민 명동례(68)는 말한다.마을주변에 고인돌이 20여기 정도있었다. 이를 볼 때 적어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다. 하지만 1850년경 진도에서 박지용이 이주하여 살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는 입촌설이 공식적인 기록이다.나주목사가 진도를 가는 길에 잠시 쉬는 와터가 맹재석(69)씨 텃밭에 있었다. 예전에 밭정비를 할 때 기와장과 주춧돌이 발견되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길 건너에 원님을 접대하기 위해 구성된 패랭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다.마을뒷산 무안박씨 묘지 밑에 하늘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생겼다는 구덩이가 있다. 이 바위가 그르면서 골을 만들어 마침내 산아래에서 멈추었다. 이를 ``할미바위``라 부른다.고암이란 지명은 할미바위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앞 밭에 작은 바위가 있어 이를 할아버지 바위라고 불렀는데 이 바위 위에 올라가 할머니를 외치면 할미바위에서 숟가락을 솥을 긁는 소리가 났다는 전설이 있다.작년에 면사무소에서는 소규모 마을을 인근 동네와 합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해방전에 이마을을 용반, 대상과 한 동네였다. 당시 성향이 다른 동네가 합해지면서 상호간에 불신과 반목이 심해 어려움이 많아 해방 후 단일부락으로 독립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규모의 경제를 따르기 보다 단일마을로써 순수성을 지키면서 자립하기를 원했다. 이장을 필두로 군수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고암``이라는 이름을 지켰다는 서정근씨의 설명이다.예전에는 부촌에 속했다. 청장년이 동네를 떠나면서 이제는 농토를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내주고 소작을 받아 살아가는 집이 늘어났다. 이렇게 어렵다보니 회관이 쓸어져 가도 신축할 여력이 없다. 과계기관의 협조를 바라며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에 차량통행이 늘면서 사고의 위험이 증대하여 이설하는 것을 시급한 사업으로 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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