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북일면 주민자치회장)

 
 

지금으로부터 어언 20여 년 전, 2004년 3월에 대통령이 국회에서 최초로 탄핵되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사유로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되었으나, 2개월 후인 5월 헌법재판소가 이를 기각하여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그 와중에 총선에서 소수 여당이 의석 수 절반을 훨씬 뛰어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극우 보수 시각을 가진 언론들은 탄핵의 당위성을 계속 설파하였지만 국민 여론은 70% 이상이 부당하다고 보았다.

당시 '총선 시민낙선연대'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으로서 부적합한 인물들을 추려서 낙선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시기 시민연대의 중요 간부들이 3월 중순 지방으로 연대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순회 활동을 시작하기 전 서울 평창동에 모여서 논쟁을 한 일이 있었다. 이제 한국은 선거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정권이 바뀌어 법률적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심판 받도록 해야 한다고 한 간부가 주장하였다. 이에 다른 한 간부가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냐고 따졌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니 '택도 없는 소리'라고. 지금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고. 이후 길고 긴 논쟁이 이어졌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을지 모르나, 그 과정의 왜곡과 권력의 독점 구조, 특히 권력이 나오는 통로가 국민이 아닌 언론재벌 구조로 지배되는 현상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논박에 지나친 과장과 당파적 견해라고 반박이 이어졌다. 사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사회권력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구조를 선택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불과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와는 먼 껍데기만 부여잡고 있다. 이를 실감한 후에야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한참 잘못된 길로 들어선 이후이다.

당동벌이(黨同伐異·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는 서로 돕고 그렇지 않은 무리는 배척함)가 예나 지금이나, 조선 시대나 현대 사회에서나 횡행하고 있다. 우리 주변 일상에서 쉽게 보는 광경이고, 특히나 윤석열 정부 들어서 나라의 잣대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편향되어 작동하고 있다. 검사는 무조건 가치와 권력의 최상층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사회가 삭막하기 그지없게 치닫고 있고, 법치를 가장한 법상시들이 날뛰고 있다. 검사는 권력층이 아니라 법률이 부여한 죄를 범한 자들을 가려서 기소하는 기관일 뿐이다. 기소권을 남발하면 할수록 그들은 권력의 시녀로서 그 위상이 더욱 튼튼해질 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으나, 현 검찰 권력이 극에 달한 정부에서는 죄를 빌미로 그들의 뜻에 반하는 국민은 모두 적으로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

상식 밖의 일이 아무런 제재 없이 계속되는 이유는 한국 언론을 쥐락펴락하는 특정 언론의 자기 지상주의로 여론을 조작하는 일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한국의 '조선주의'라 부르고 싶다. 특정 언론이 아침에 논설을 펴면 바로 정책에 반영되고, "나빠"하고 찍으면 바로 수사하는 고장 난 잣대로 정부 정책을 농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정치가 가능한 이유는 한국 지성이 아직 낙후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우 이념에 갇혀있고, 지역감정에 갇혀있고, 자기만 옳다는 '조선주의'로 필설을 휘갈기면 이를 받아적는 조선언론 공화국인 셈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논리 수준을 이끌 힘이 한국 지성에 없다는 것인가. 6·25 이래 70년 이상을 써먹는 진영 논리와 반공 논리로 모든 악행을 뒤엎는 오싹하게 저열한 수준으로 지성이 낙후됨을 넘어 지저분하게 타락함을 보며 개탄스러운 글로 분노를 던진다.

'조선주의', 단 한 번도 그름이 없다고 오만하게 군림하는 한국의 암 덩어리를 깨끗하게 제거하지 않고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꽃을 피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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