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이 두 달 보름 남짓 지나면 만 43년이 된다. '5·18 둥이'가 어느덧 나이 지긋한 중년에 접어들고, 7년이 다시 흐르면 반세기라는 세월의 무게가 더 얹어질 것이다. 5월도 역사의 한켠으로 더 내려앉고 시나브로 가물가물해지리라.

이런 안타까움 속에 5월의 진상규명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 틈새를 '피해자 코프레스'가 파고들고 있다. '5월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동지회가 얼마 전 일부 5월 단체와 합작한 '화해 선언식'이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지금의 5·18단체는 사망, 부상, 구속이라는 피해 상황에 따라 3개가 결성돼 활동하고 있다. 희생자 유가족 중심의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부상자 중심의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구속자(연행자) 중심의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이다. 이들 단체는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되다가 지난해 공법단체(公法團體)로 바뀌었다. 5·18유공자법에 근거한 공법단체가 되면 정부예산으로 운영비 등을 지원받고 수익사업도 할 수 있어 재정 여건이 훨씬 나아진다.

그런데 부상자회와 공로자회 등 5·18 두 단체가 5월 광주의 가해자인 특전사동지회와 합작해 일을 저질렀다. 지난 19일 광주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포용과 화해와 감사-대국민 공동선언식'에서 3개 단체 대표가 서명한 선언문이 궤변으로 점철됐다. 일부 내용을 옮겨본다. '5·18 당시 계엄군의 활동을 민주시민의 정의로운 항거를 억압한 가해자로 볼 것이 아니라 상부의 명에 복종하는 것이 불가피하였고 다수가 오늘날까지 정신적·육체적 아픔으로 점철해 왔단 점에서 피해자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5·18민주화운동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시비론(是非論)적인 관점이 아니라 당시 양측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양시론(兩是論)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을 죽여놓고 죄책감에 시달렸으니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5·18 공법단체가 한통속이 되었다는 게 황당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언식에서 5·18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과 특전사 승전가인 '검은 베레모'를 제창하기로 했다. 특전사 예비역은 공법단체 제안으로 행사 직전 군복과 군화 차림으로 5·18민주묘지 추모탑을 도둑이 잠입하듯 기습 참배하기도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43년 만에 화해의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근데 사과와 반성도 없이. 모두가 피해자라는 논리로 화해하자는 게 논리적으로 맞겠는가. 유족회가 이런 실체에 발을 빼고 시민사회단체도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화합하자며 만든 '빗나간' 행사가 상처만 더 낸 셈이다.

이번 행사에 군수 명의의 책자 수록용 축사를 보낸 해남군을 비롯한 영암군, 담양군에 불똥이 튀었다. 공법단체의 요청을 외면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더라도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아 빚어졌다고 봐야 한다. 해남군은 뒤늦게 축사를 취소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격이 됐다.

5·18묘지에 잠든 오월 영령은 군홧발 차림으로 불쑥 찾아온 특전사에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올해 말이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4년 활동이 끝나고 해법도 나온다. 그때 진정성을 갖고 화해와 포용의 길을 여는 게 시대의 소명이다. 그래야 오월 영령도 편히 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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