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경(전 광주일보 편집부국장)

 
 

홀연히 해남읍에 나타난 '전두환'. 꼭 42년 전인 1981년 3월 18일, 12대 대통령이던 전두환이 돌연 해남에 '출몰'했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3월 25일)를 단 1주일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해남·진도선거구였고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전두환이 총재로 있던 민주정의당, 유치송의 민주한국당, 김종철의 한국국민당 등 주요 정당 후보가 지역에서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선거전이 치러질 무렵 약관이던 필자는 모 야당 후보 선거사무실에서 자원봉사 중이었다. 어느 날 잔심부름을 위해 해남 시가지를 돌아다니던 중 읍내 곳곳에서 어슬렁거리던 검은 양복쟁이들(나중에 알고 보니 경호원)이 의아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점심 무렵 갑자기 옛 해남여중(현 해남제일중)에 시커먼 헬기 대여섯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앉더니 뜻밖에 전두환이 출현한 것이다. 광주-나주-해남 등지 현장 점검 명목이었다.

총선 막바지에 여당 총재인 현직 대통령이 지역을 찾는다? 지금은 응당 탄핵감이지만, 12·12와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이후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서슬 퍼런 철권 앞에서 누구 하나 토를 달 수 없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선거인단의 체육관 투표로 갓 12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터여서 가히 무소불위였다.

당시 해남·진도에서는 국민당 이성일, 민한당 민병초, 민정당 임영득 후보(득표순)가 각각 조직력과 경력을 내세우며 접전 중이었다. 선거 막판에 집권당 총재인 현직 대통령이 격전지를 방문한 구체적 사유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의 방문만으로도 야당 후보 캠프는 크게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이변'이었다. 1위는 합계 2만 6700표의 이성일 후보. 이어 2만4775표의 민병초 후보가 3위와 불과 924표 차로 당선됐다. 현직 대통령까지 날아왔지만 여당 후보가 낙마한 것이다. 전국 92개 지역구 가운데 민정당 후보가 낙선한 곳은 해남·진도와 제주 두 곳뿐이었다.

전두환까지 가세한 해남·진도에서 야당 후보가 모두 승리한 까닭은 뭘까? 후보 진영마다 조직력 등의 차이가 있었겠지만, 신군부의 횡포와 5·18 강경 진압을 목도한 해남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독재 항거가 가장 큰 동력이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필자가 속한 후보 사무실에는 수시로 '기관원'들이 들락거리는 것 같았고, 유형무형의 압박도 있었겠지만 맨 졸병인 터여서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었다. 배수의 진을 친 운동원들은 "전두환까지 나타난 마당에 선거에서 지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다. 일단 선거라도 이겨놓고 보자"는 절박감에 죽기 살기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전국에 해남인들의 높은 민주 정신의 기개를 떨치게 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해남 정치의 명성은 빛이 바랬다. 국회의원 한 명은 중도하차했고, 세 명의 군수가 줄줄이 교도소 문턱을 넘고 말았다. '전두환도 거꾸러뜨린' 해남 정치 위상에 큰 생채기가 남은 것이다.

내년 4월 10일 실시되는 22대 총선이 다가오면서 선거 이야기가 서서히 입에 오르내린다. 그렇다면 해남 정치의 명예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40년 전 해남 유권자들의 화두가 '민주'였다면 이젠 '민생'과 '자활'(自活)이 최우선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해남처럼 농어촌은 인지도나 혈연, 지연, 학연이 당락을 결정하는 게 현실이다. 한 번 뽑히면 배경만 믿고 '권세 자랑'하다 잡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일부는 공직을 '자기영역 확대' 수단으로 삼다가 물의를 빚는다. 권력에 취해 도를 넘으면 도태되고, 심하면 처벌된다.

관건은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이다. 중앙 정부와 국내외 기업을 상대로 민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자활을 도모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를 먼저 찾아야 한다. 여기에 정치인 스스로 면모를 일신하고, 겸양을 갖춰야만 40년 전 전두환을 굴복시킨 해남 정치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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