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토끼다'라는 다소 상스러운 말이 있다. 예전 학창 시절 불량한 짓을 하다 선생님에게 들키면 "토끼자, 토껴"라고 외치며 도망치던 추억이 하나쯤 있을 성싶다. '토끼다'는 토끼가 위기를 재빠르게 벗어나는 모습에서 따온 표현이다. '토끼'라는 명사에 어미 '다'를 붙여 만들어졌다. 이런 형태는 (신발·양말을)'신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토끼(卯·묘)는 12지(支) 가운데 상상 속의 용(辰·진)을 제외한 실재의 동물에서 강아지(戌·술)와 함께 가장 만지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친근하다. 그래서 반려토끼, 반려견으로 사랑받는다. '토끼 같은 자식'이나 '내 강아지'라는 어르신의 말에서 보듯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식이나 손주를 이들 동물에 비유하곤 했다. 요즘엔 낯선 모습이지만 예전 농촌의 시골집에는 조그만 우리 안의 앙증맞은 토끼가 손님을 맞이하곤 했다. 70년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새마을운동의 농가 소득증대 일환으로 토끼 입식을 장려한 때문이다.

토끼는 동양 설화에서 민첩함과 지혜, 기지가 넘치고 민초(民草)를 대변하는 동물로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구토설화(龜兎說話)가 대표적이다.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다가 첩자로 오인돼 옥에 갇히자 고구려 장수 선도해가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들려준 이야기이다. 토끼가 거북이의 꾐에 빠져 용궁에 끌려갔다가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내용이다. 구토설화는 고전소설 '토끼전', '별주부전'이나 판소리 '수궁가' 등으로 진화한다.

설화 '옥토끼'는 우리나라 동요의 효시라는 '반달'(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을 잉태했다. 토끼가 등장하는 동요는 수없이 많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산토끼),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옹달샘) 동요에서 토끼는 어김없이 상상과 꿈을 자극한다.

서양에서 토끼의 이미지도 엇비슷하지만 왕성한 번식력 때문인지 음란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창작된 '이솝 우화'에는 토끼를 주연으로 한 10개 가까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부분 연약한 존재로 등장하나 '토끼와 거북이'에선 거들먹거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둘의 달리기 시합은 말도 안 되지만 '노력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서양에서는 '토끼잠'을 자지 않은 탓일까.

올해는 '검은 토끼의 해'인 계묘년(癸卯年)이다. 2023년 계묘년은 한두 살이 줄어든 해로 기록되게 됐다. 오는 6월 28일부터 '만(滿) 나이 통일법'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사실 달라질 게 별로 없지만 젊어진 듯한 좋은 기분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12월 31일 태어난 아이의 나이 셈법은 참 재밌다. 흔히 쓰이는 '세는 나이'로 치자면 태어나자마자 1살이 되고 하루 만인 새해 첫날 2살이었다가 6월 28일이면 '만 나이'가 적용되어 0살이 된다. 이 아이는 올해 12월 31일이 되어야 비로소 1살이 된다. 생일과 관계없이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뺀 '연 나이'는 일상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지만 언론과 일부 행정에서 쓰이고 있다.

하여튼 한두 살 어려지는 계묘년이 출발을 알렸다. 한 마리 잡기도 힘들다지만 모두에게 '쫓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계묘년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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