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왕족의 영화 세월속에 남아

참판이 살았던 집
어릴 적 고래등같은 큰 기와집을 지날 때면 저 집안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늘 궁금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었을 터인데 그 고가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함과 동경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지체 높은 양반들의 거처로 생각할 수 있는 이러한 고가는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때론 몰락하여 주인 잃은 고가의 기와 사이에서 난 잡초들이 옛 영화의 잔영만으로 쓸쓸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흔히 이참판댁이라고 하는 황산면 우항리 정명식(67세)씨 고가를 찾아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우람한 솟을대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장관급에 해당하는 참판(종2품)의 집이었으니 그 권세에 비견하여 지었을 터이지만 해남에 남아있는 고가 중에 가장 큰 솟을대문에 해당할 것이다.
 이 집은 현재 도지정문화재(민속자료 8호)로 되어 있으며 그동안 보수를 지속적으로 해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변의 담이 깨끗이 정비되어 있다.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단장한 것은 좋지만, 전통의 미가 그렇듯 그것이 조금은 어색하고 정이 얼른 안간 것도 사실이다. 단장하기 전, 세월의 흔적이 켜켜히 쌓인 것처럼 고풍미를 느끼게 했던 긴 행랑채 처마 기와의 아름다움은 이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정명식씨 고가로 들어가는 집 옆에는 같은 일가가 살았다는 퇴락한 기와집이 마당가로 무성하게 난 풀 속에서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 집은 이 참판의 작은댁이었다고 한다.
 퇴락한 영화의 잔영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오랜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휩쓸리어 푸른 이끼가 돋은 기와 한 장이 더 정이 드는 것은 옛것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애정인지도 모른다. 그 애정은 반쯤 허물어져 가고 있는 높은 기와담 에서도 마찬가지다.
 족히 2m는 훨씬 더 높아 성처럼 보이는 이 기와 담은 담의 처마가 옆으로 쭉 한없이 멋스럽게 내려뜨리고 있다. 성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듬은 돌을 흙 사이로 촘촘하게 박아 쌓은 견고한 담의 모양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히 보면 그 담은 집을 지을 때처럼 나무처마를 받치고 흙을 바른 다음 그 위에 기와를 얹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담 위에 기와를 얹어 쌓는 것에 비하면 궁궐에서나 있을 법한 담의 양식을 연상케 한다. 이 담 또한 집안의 권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가의 담도 이러한 양식이었으나 보수를 하면서 원형의 모습을 바꿔버려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왕족의 후예
 이러한 집의 규모를 갖게 한 배경은 무엇일까? 한때 영화를 누린 한 반가(班家)의 이야기가 이곳에도 있다. 그것은 원래 이 집의 주인이었던 참판 이재량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는 왕족도 힘을 제대로 못쓰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던 모양이다. 1730년, 인평대군 ‘요'의 4대손이고 이재량의 4대조(祖)인 ‘명석'이 진도로 귀향을 가게 되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 황산면 우항리에 머무르게 된다.
 이후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는데 이재량은 1857년 철종때 이곳 우항리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재량은 고종황제와는 8촌간이 되기도 한다.
 대원군의 등장은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처신을 하지 못했던 이들을 모이게 하고 관직을 박탈당했던 이들이 다시 복원된다. 이재량도 대원군의 천거에 의해 등용되어, 양호선무종사관에 제수되었다가 남평현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통정대부 등을 거쳐 광무 6년 가을에 품계가 가선대부 참판에 오르고 그로부터 3대가 추증되었다. 그러나 을사년 가을에 사임하고 고향에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쓴다.
 그는 만석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겸손하고 주위에 자선을 잘 베풀었다고 한다. 천석꾼만 되어도 부자라는 말을 듣는데 만석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만 하다. 흔히 말하는 우항리 일대를 지나칠려면 이참판댁 땅을 밟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우항리 일대는 거의 대부분이 그에게서 임대로 경작을 하였는데 주민들에 대한 구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하에서는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었을 때 국채보상소를 설립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고 하니 지역에서 폼재고 권세나 부리는 양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참판댁의 영화도 명운이 다했는지 이참판이 죽은 후 가산은 점점 기울기 시작하여 저택 또한 팔리고 그 후손들은 서울로 모두 이주하고 지금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지주들이 대부분 근대화 과정에서 몰락해 가듯이 이참판댁도 6·25후 토지개혁에 따라 재산이 줄어들고 무너진 신분체제 속에서 농사로 대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신분사회에서는 토지를 기반으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려 재산 유지가 가능했으나 이것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점점 몰락해 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지금 이 집은 그 원래의 주인대신 정명식씨 가족이 살고 있다. 정명식씨 집안은 이참판댁의 외가이다. 이참판의 친어머니가 정명식씨 집안인 동래정씨이기 때문에 이러한 연유로 이 집을 지난 68년 무렵에 사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왕족의 후예로 많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참판 이재량은 이제 오래 전 그가 살았던 고택의 흔적만 우항리 너른 발판에 남겨놓고 있다. 현대화되어 가는 생활로 인해 우리가 사는 주거환경 또한 급속하게 서구식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수 천년 동안 살아왔던 한옥 또한 점점 그 원형이 사라져 가고 있고 건축미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전통고가는 문화재로나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해남지역의 전통 가옥을 찾아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이 한옥을 통해 어떤 지혜로 살아왔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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