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경내에 자리한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를 기리는 사당이다. 사당(祠堂)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유교 문화와 밀접하다. 그래서 불교를 구현하는 사찰 중심에 유교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 아주 독특하다.

대흥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되어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사실 고만고만한 사찰에 불과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서 승보사찰(僧寶寺刹) 종갓집의 위상은 서산대사와 표충사, 그리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선 조선 정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묘향산에서 수행하던 73세의 서산대사(휴정)는 팔도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띄워 5000명의 승병(僧兵)을 조직하고 본부를 대흥사(당시 대둔사)에 두게 된다. 서산대사는 직접 전투에도 참가하고 모두가 제자인 승병의 장수들을 지휘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피난지인 신의주에서 한양(서울)으로 돌아온 선조는 대선사(大禪師)와 지금의 장관급인 정이품을 내렸으나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유정)과 처영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간다.

85세(1604년)에 입적하자 유언에 따라 3년 뒤 금란가사(옷)와 발우(밥그릇) 등 유품이 대흥사에 봉안된다. 가사와 발우를 전한다는 것은 법맥(法脈)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서산대사는 제자들이 하필 남쪽의 외진 조그마한 절을 꼽느냐는 물음에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地)'이라고 했다.

이후 1669년 대흥사 경내에 서산대사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고,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가 배출된다. 1788년에는 정조가 그의 공적을 높이 여겨 '표충사'라는 이름과 현판을 내려주고 조정에서 예관과 헌관을 보내 제향(祭享·나라에서 지내는 제사)하도록 했다. 이 때부터 대흥사 위상은 급격히 올라가게 된다. 스님들은 잡역을 면제받고 조정의 지원을 받게 되자 선비들도 업신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세 큰 스님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표충사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린 춘추제향이 1871년까지 이어지다 명맥이 끊기게 된다.

이와 달리 경남 밀양 표충사(表忠寺) 표충사당에서 열리는 사명대사 향사(享祀)는 27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밀양은 사명대사의 출신지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제향도 불교와 유교 의례가 융합된 것이다.

서산대사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표충사 제향이 늦게나마 지난 2012년 유교식 제향을 재현해 부활한 이래 매년 열리고 있다. 서산대사 탄신 502주년인 올해에는 내일 오전 표충사에서 개최된다.

이에 앞서 대흥사 표충사 향례보존회 발족식이 지난 3일 대흥사 경내 보현전에서 열렸다. 보존회는 앞으로 전승자를 배출하고 국가제향 계승과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게 된다.

표충사 제향은 정조 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성을 갖고 있다. 꾸며낸 역사도 있는 마당에 이런 확실한 역사성을 가진 제향은 해남의 문화자산으로 가꾸고 미래 세대에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 호국의 표상인 서산대사와 유·불교가 융합된 이례적인 제향은 가치가 높은 자산이다. 그런 만큼 불교와 유교의 본산인 대흥사와 해남향교가 손을 맞잡고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행사, 국가적인 문화행사로 발전하도록 함께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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