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인의 부친은 해남읍에서 법무사로 일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됫병 소주를 비웠다고 한다. 몇 년 후 지인의 아버지는 작고했지만, 십수년 흐른 지금도 '낮술', '깡소주'(강소주)라는 말과 함께 기억에 남는다.

'됫병 소주'는 한 되(1.8리터) 분량이어서 2홉들이(360ml) 소주 5병을 매일 마셨다는 얘기가 된다. 소주잔(50ml)으로 가득 채우면 36잔, 흔히 사용하는 맥주잔(225ml)으로 8잔이다. 이런 주량에다가 낮술은 '애미애비(어미, 아비)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금기로 통한다. 에너지가 왕성할 때 마시는 낮술은 취하기 쉽고, 그래서 주사(酒邪)에 빠질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깡소주'라고 잘못 사용되는 강소주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는다는 뜻의 접두사 '강'이 붙은, 그래서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이다. 위장으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음주 습관이다. 스트레스까지 얹어지면 위는 분노하고, 막판에는 '너 죽고 나 죽자'며 대든다. 많은 양을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나홀로 강소주를 마셔댄다면 알코올중독의 한복판에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소주는 원래 몽골군이 정복지인 페르시아에서 제조법을 배워 고려 침략 당시 주둔지인 개성, 안동, 제주에서 만들어 마셨다고 전해진다. 몽골군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입됐다고 본다면 그 역사가 700년이 넘는다.

소주(燒酒)는 '태워서 만든 술'이라는 한자가 말해주듯 원래 목을 태우는 듯한 독주(毒酒)인 증류주이다. 발효된 술덧을 가열해 알코올을 추출하기 때문에 도수가 아주 높고 나오는 양도 적다. 그래서 조선시대 백성은 마시기 버거운 고급주로 통했다. 이런 차에 일제시대인 100년 전쯤 증류주(주정)에 물을 타서 알코올 도수를 낮춘 게 지금의 희석식 소주이다. 하지만 도수가 35도로 여전히 높았다.

'30도 소주'의 대중화를 말할 때 전라도 사람은 '삼학(三鶴)소주'의 아픔을 빼놓지 않는다. 지금은 육지가 된 목포 삼학도에서 이름을 딴 삼학소주는 1960년대 국내 소주시장을 지배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납세 증지'를 위조해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세무조사를 받고 2년 후 공중 분해된다. 전라도인은 지금도 '박정희와 맞붙은 김대중에게 자금을 댔다는 괘씸죄로 비운을 맞았다'며 애잔함을 숨기지 않는다.

'이별과 눈물이 많은 땅위에서/눈물 대신 삼학소주를 마신다/두메산골 논두렁 위에서도/연락선이 고동을 울리는 항구에서도/우리들은 독한 소주의 향기를 씹는다/중략/삼학도도 목포도 한많은 영산강도/창자 속에 들어가 흔들리는 어지러움/구멍 뚫린 우리네 가슴 밑으로/시뻘건 황토물만 흐르고 있구나/빈 병 속에 어둠만 고이고 있구나' 대표적 저항시인 문병란(1935-2015)은 '삼학소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1970년대 '25도 소주' 시대가 열리면서 막걸리를 밀어내고 국민주의 자리를 꿰차게 된다. '소주=25도'라는 20년 가까운 상식은 1990년대 후반 23도짜리가 나오면서 무너지고, 이후 끝없는 저도주(低度酒)의 길을 걸었다. 이젠 13도까지 내려왔다.

소주는 1960년대 이후 60년 가까이 '서민의 술'로 애환을 함께 했다. 이젠 '서민주'로 부르기가 어색해졌다. 해남의 식당가에서 '5000원'이라는 메뉴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오르면 1000원'이라는 소주값 인상의 법칙이 여지없이 적용된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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