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삔쭈 밥신평호(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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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1.11  18: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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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다 갔다. 스산한 들녘에 남은 건 곡식을 거두고 남은 볏단과 깻대, 콩대 등이다. 옛날에 논에 떨어진 낟알들로 들짐승과 새들이 겨울나기를 했다. 지금은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 깨끗하게 훑어진 볏짚만 남는다. 볏짚조차도 남김없이 비닐에 싸여 축사로 옮겨진다.

코로나19 국민재난지원금의 해남 수급 비율이 신안 다음으로 높았다고 한다. 물산이 풍요롭다고 하지만 국가 표준으로 보면 소득이 낮다는 말이다. 소득이 누락 되어 세금으로 판정된 표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여간 길거리에 거지도 없고 극빈층도 없는 지역이다. 인심이 메마르지 않은 고장이다. 한국에서 그 지원금 비율이 가장 낮은 서울 강남보다 행복지수가 높고 살기 좋은 곳이다.

어느 동네 과실 나무들을 보면 을씨년스럽다. 감나무가 텅 비었다. 새 먹이로 남겨질 몇 개의 홍시마저 눈에 안 보인다. 감나무에서 감을 따고 일부러 몇 개를 새 밥으로 남겨놓는 감을 '삔쭈 밥'이라고 부른다. 미물에게도 인심이 넉넉한 선조들.

당신의 삔쭈 밥은 무엇인가.

야생 새들과 더불어 사는 마음이 남겨지는 풍경이 우리의 자연이다. 시골에 살면서도 시멘트 아파트 입주하려고 억대의 대출에 혈안이고 영혼까지 당겨서 주식투기에 열 올리는, 마치 도둑놈이 자기 아들에겐 도둑질하지 말라는 허황된 말들이 난무하는, 시멘트 문화의 모순이 시골까지 전파되고 있다. 살 땅이 넉넉한 곳의 외국에선 'flat'라 부르는 빈촌의 대명사인 아파트를 부의 상징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에 넉넉한 인심은 어디에 두었는지 묻고 싶다. 더불어 사는 동네를 떠나 오로지 편리함만 보고, 자기만 챙기는 아파트로 가는 청년들에게 삔쭈 밥은 남겨두었는지도 묻고 싶다.

거창하게 '인간과 자연의 공존', '반려동물' 등 관념적이고 지적인, 피부에 전혀 와 닿지 않는 언어로 희롱하는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유 있게 나무에 매달린 삔쭈 밥은 자연의 넉넉함을 보여 준다. 반려동물이 중요한 양견양묘 시대에 개를 실내에 키우고, 입마개를 하며 키우는 모습, 이게 과연 동물사랑인가. 무엇을 위한 사랑인가. 자기 옆의 동물은 끔찍이 사랑해 주면서도 이웃의 바싹 마른 삶은 외면하는 세상에 반려동물은 무슨 의미를 주는가.

석과불식(碩果不食). 도시의 청년들이 내년에 심을 씨앗조차도 먹어 치웠다면 시골로 가서 씨앗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부당한 꿈을 꾸며 아스팔트 길 위에서 꽉 막힌 도로가 그저 뚫리길 기다리는 시간으로 자신을 죽이지 말고, 흙과 함께 살며 부활해보라는 것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돕고 사는 세상, 그것이 땅끝의 희망이고 인심이다.

다 거두어간 자리, 자본주의 전투가 끝난 창고 앞처럼 텅 빈 들녘에 몇 알 걸린 울타리 넘어 감나무의 삔쭈 밥은 삶의 따뜻한 정을 준다. 학교 다녀오면 할머니가 뒷마당 광에서 꺼내주던 곶감처럼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감나무에 걸린다.

낟알 하나 남김없이 추수 끝난 잔인한 들녘. 그럼에도 새들은 날고 자연은 숨 쉰다. 젊은이들이 늙어는 봤는가. 그럼에도 모든 걸 다 안다는 식으로 가상공간의 세상을 전부인 양 대하며 현실을 외면하는 그들에겐 아예 삔쭈 밥은커녕 감나무조차 없다. 나의 행복에만 집중하는 길 위에서, 귀찮다고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바로 옆에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늙어가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며 잘 익은 감나무에 남겨진 삔쭈 밥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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