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해남이라고 하는 지인이 있다. 그의 부친은 매년 새로운 임지로 부임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는 초등 시절 부친을 따라 해마다 군 단위를 달리하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다. 여섯 군데의 초등학교를 다닌 셈이다. 해남은 그에게 태어난 곳도, 영유아기를 보낸 곳도 아니다. 그에게 고향을 물어보면 해남이라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 부친의 고향이고 학창 시절 1년을 보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콕 찍어 고향이라고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성장기에 어느 한 곳을 정착지로 삼지 못한 때문이다. 이들의 고향은 애매하다. 반면 생각만 해도 따뜻해지는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에게는 동네 어르신, 친구, 맘껏 뛰어놀던 자연과 초목 등의 추억이 풍성하다.

고향이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의 대상이 된 데는 60~7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와 관계가 깊다. 수많은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났다.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젊은이들도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도시로 향했다. 농사 말고는 일자리가 거의 없던 전라도는 최대의 인력 공급처가 되었다. 이게 국내외에서 독보적인 호남향우회로 성장한 배경이다. 호남향우회는 해병대전우회, 고려대 교우회와 함께 '대한민국 3대 (불가사의)단체'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결속력이 가장 강하면서도 배타적인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

이런 시대 상황은 인기를 먹고 자라는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로 고향이 등장하게 만들었다. 북일을 고향으로 둔 가수 오기택의 노래 '고향무정'(1966년 발표)도 맥락을 같이 한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산골짝엔 물이 마르고/기름진 문전옥답/잡초에 묻혀있네/' 해남중을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오기택(82)은 이 노래로 국민가수 반열에 올랐다. 지난 주말에는 군민광장에서 '고향무정 고향유정' 콘서트도 열렸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중가요는 일제 시대의 타향살이(고복수)를 비롯 고향역(나훈아), 고향이 좋아(김상진) 등 70년대까지 맹위를 떨쳤다. 고향은 늘 가슴 한 켠에 자리한 그리움을 끄집어내고, 누구에게나 애절한 사연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향세'라고 하는 '고향사랑 기부금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했다. 오는 2023년 1월부터 시행되는 이 법은 출향인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제외한 자치단체에 연간 500만 원까지 기부할 수 있도록 했다. 기부자에게는 10만 원까지 전액과 초과분의 16.5%를 세액공제하고, 기부액의 30% 이내에서 해당 지자체의 특산품·상품권 등을 답례품으로 줄 수 있게 했다. 고향 발전을 위한 출향인들의 기부를 활성화하겠다는 취지이다. 이 법안은 지난 2008년 시행에 들어간 일본의 '고향납세제'를 본받았다. 지난해 고향납세액이 7조원에 이를 정도로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내후년 도입되는 고향세의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멸위기에 처한 농어촌을 어느 정도 살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다. 기부금 사용처가 취약계층 지원이나 교육, 문화예술, 의료 등의 증진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고향세의 가장 큰 혜택은 출향인이 가장 많은 전라도라는 말도 나온다. 해남을 보더라도 출향인이 해남 인구의 6배가 넘는 45만 명으로 추산된다. 고향세가 애향심의 자양분이 되면서 사라져가는 고향을 살리는 묘수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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