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67·Michael J. Sandel)은 한국을 ‘마음에 쏙 드는 아주 각별한 나라’로 여길 것이다. 자신의 인문학 저서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고작 10만부 안팎의 푸대접(?)을 받은 반면, 한국에서만큼은 100만부를 훨씬 웃도는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특별한’ 한국에서 몇 차례 강연을 했다. 이달 JTBC 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두 차례 언택트 강연도 선보였다. 그의 주된 담론은 정의와 공정이다. 이들 주제가 우리나라에서 유달리 관심을 끈 바탕에는 그만큼 정의와 공정에 목말라 있는 현실이 깔려 있다. 우리 사회가 이들 주제와 동떨어져 있음을 반증한 것이다.

2010년 번역 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2009년 작)는 우리나라에 ‘정의’에 대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샌델 교수는 이 책에서 정의의 사례를제시한다. 미국 명문대 입시에서 백인과 흑인의 성적이 똑같을 때 누구를 합격시켜야 하는가. 대학이 흑인의 입학을 허가하자, 탈락한 백인이 법정 소송을 냈다. 법원은 대학의 손을 들어줬다. 교육여건이 훨씬 열악한 상태에서 동일한 성적을 낸 흑인을 합격시키는 게 정의라는 것이다.

샌델 교수의 ‘정의’가 출간된 지 10년 만인 지난해 말 ‘공정하다는 착각: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라는 인문 서적이 국내에 상륙했다. 이 책도 출간되자마자 수개월째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번역본은 상술이 끼어들어서인지 원제(原題)에 충실하지 못한 면이 있다. 원제를 그대로 옮긴다면 ‘능력주의의 폭정:무엇이 공동선이 되나’ 정도로 해야 맞다. 이 책 내용은 줄곧 능력주의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에서는 인종이나 출신 계층,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재능과 노력으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능력의 최대 지표는 학력이다. 대학 간판이 개인 능력의 잣대이다. (우리나라는 학력주의보다 질이 더 안 좋은 학벌주의에 빠져 있다.) 샌델은 능력주의 자체는 물론 이의 기준인 학력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상류층은 부나 학력의 세습을 위해 고가의 개인 교습 등으로 명문대의 문을 넓게 만든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일지라도 성공을 정당화시켜주고, 실패한 사람에게도 자기 탓으로 돌리게 한다.

올해 초 경향신문의 설문조사에서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공정’을 꼽은 응답자가 절반에 육박한 40.7%에 달했다. 이는 우리 사회에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을 선언하며 시작했다. 과연 이런 길을 걸어왔을까.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최근 법정 구속됐다. 재판부가 그들만의 리그, 곧 캠코더(대선 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로 일컫는 낙하산 인사에 경종을 던진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산하기관의 인사도 이에 못지않은 불공정의 연속이다. 외부 전문가를 뽑는다며 ‘공모’라는 허울을 내세워 낙하산 인사를 거침없이 해댄다. 이는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자 기만이다. 샌델 교수가 의문을 던진 능력주의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그러니 혈연, 학연, 지연을 모조리 찾도록 한다.

샌델 교수는 결론(능력과 공동선)에서 능력주의로 인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고 썼다. 이를 우리 사회에 빗대 말해본다. 연줄로 성공한 사람은 그것도 충분한 자격의 한 요건이라고 여기고, 실패한 사람도 연줄 없는 탓에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모두가 불공정 사회의 직간접 공범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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