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주부)

 
 

현관문을 나서니 바람이 상쾌하고 햇볕은 따스하다. 올리브 그린색의 야외 테이블이 잠시 쉬어가라 손짓한다.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처음엔 작은 뱅갈고무나무 화분이 하나 나오더니 차츰차츰 늘어 지금은 테이블 앞을 가득 메우고 있다.

때늦게 피고 있는 수국은 환하고 얼마 전 작고한 16층 할아버지를 기리는 국화는 쓸쓸하다. 테이블 위, 15층 미숙 씨가 사다놓은 애플민트를 가만히 만져본다. 달콤한 향이 양 손에 가득하다. 자연스레 눈길이 주차장 벽화로 향한다. 행복한 추억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보다.

지난 5월 5일 주차장에 벽화를 그린 그날, 이른 아침부터 주차장 비우느라 분주했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열심히 페인트칠했던,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뒤풀이 맥주를 담당했던, 그리고 끝까지 함께 얘기하며 큰 웃음 지었던 우리는 모두 하나였다.

올해, 우리 아파트가 주차장 벽화와 함께 마을공방을 열고 음악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작년 12월 어느 날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작년 7월 초에 '치맥과 함께하는 초여름밤 천변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아름다운 우쿨렐레와 오카리나, 기타, 그리고 우아한 색소폰 소리와 경쾌한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해남천에서 때 이른 물놀이를 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신났었다.

이 행사를 일회용으로 끝내야하는 게 안타까웠는데 11층 미희 씨도 그랬나보다. 해리 다리 아래에서 열었던 음악회를 계속할 수 있다며 전남마을공동체 활동지원 사업에 공모해 보라고 알려주었다.

전남마을공동체 활동지원사업은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여 자립형공동체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씨앗과 새싹, 그리고 열매 세 단계로 나뉜다. 우리 아파트는 공동체 조직과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하는 제일 밑단계인 씨앗단계에 공모해서 선정되었다.

올해, 코로나19로 공동체 활동을 하는 게 여러모로 쉽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일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진행할 수 있었다. 예쁜 글씨로 꾸민 부채를 만들고 옥도장을 파고 무드 등을 함께 만들었다. 주차장에 건 주황색 밧줄 위에 염색한 스카프를 걸어 쪽빛으로 물들인 날, 노란빛 고운 부침개를 지져 막걸리를 마셨다. 아이들은 저녁에 모여 또 책놀이를 했다. 마스크를 써야만 했지만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코로나가 잠시 주춤했던 7월 말, 공연무대와 객석을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는 주차장의 구조를 이용해서 지역의 새로운 공연문화의 시도라는 나름 거창한 목표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올해 마을공동체 활동을 마무리한 지금 우리 아파트의 어른 여자는 아파트 아이들에게 모두 이모다. 또한, 공동체 활동이 마무리된 여름부터 우리는 아파트의 곳곳을 스스로 가꾼다. 현희 씨가 심은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다. 한 그루 있는 은목서도 올해 처음 꽃이 폈다. 내년이면 유정이와 하은이가 금강골에서 따다 뿌린 봉숭아와 14층 언니가 옮겨 심은 수국과 천사의 나팔도 내년에는 꽃을 활짝 피울 거다.

아파트는 커다란 상자 안에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며 이웃과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숟가락의 개수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필요할 때 서로 손을 내밀 수 있는 아파트 공동체는 듣기는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승강기에서 서로 주고받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시작한다.

맛있게 익은 열무김치 한 보시기를 옆집 문 앞에 갖다 놓는 아주 작은 행동이 그 아파트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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