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호(대한민국헌정회 원로회의 의장)

 
 

- 제72주년 제헌절을 맞아

1987년은 뜨거운 해였다. 27년 군부독재에 지친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분출했다.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은 커질 대로 커진 상황이었다. 그 해 4월 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선언'은 화난 민심에 불씨를 붙였다.

이는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국민적 공분을 마주한 집권당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고 곧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돼 민주헌법의 기초를 만들었다.

당시 야당이던 DJ(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나에게 새로 개정될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 참여하라고 하였고 나는 여야 10인으로 구성된 기초위원 중 동교동계 2명 중 한 명이 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이번 제헌절을 맞아 그 당시 만들었던 개정된 헌법의 주요 사항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첫째,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대통령 임기는 5년으로 한다.

둘째, 헌법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당시 헌법 체계는 전문 제1장, 총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3장 정부, 제4장 국회로 되어있던 것을 제3장과 제4장 순서를 바꿈으로 국민의 직접적 대의기관인 국회가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셋째, 경제민주화 부분이다. 이는 DJ의 '대중경제론'에 입각하여 헌법 제119조에 경제 민주화 부분을 분명히 명시하였다.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고 국가는 적정한 소득의 유지,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특별히 DJ가 나에게 헌법에 명시하라고 한 부분은 근로자들의 '이익균점권'과 '경영참여권'을 헌법에 명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항은 아쉽게도 여론과 정부 여당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넷째, 특별히 기록에 남기고 싶은 것은 '경자유전(耕者有田)', 즉 '농지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헌법 제121조에 명문화한 것이다. 이는 재벌 또는 기업들이 농토를 투기의 수단으로 삼지 못하도록 함이고 나의 평생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헌법개정특별위원장이었던 현경대 의원은 지금도 나를 보면 '경자유전 김봉호 선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섯째, 국정감사권 부활이다. 유신헌법에서 국정감사권을 삭제하여 국정조사권으로 대체해 놓았다. 그러나 이를 새로운 민주헌법에서 다시 부활시켰다. 국정조사권은 특정 사항에 대해서 국회 의결을 거쳐 발동되지만 국정감사권을 헌법에 명시하여 정기적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감사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의정 생활을 통해서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입법사항은 농어촌부채경감특별조치법 통과다. 이로 인해 당시 농어민들이 피치 못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각종 부채를 약 2조원 탕감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의료보험을 통합해 전국의료보험비의 균등 관리와 농지세·수세 폐지, 양곡관리법을 개정하여 정부 양곡 수매 가격과 물량을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또 농어민이 사용하는 각종 기자재(농기계, 비료, 사료, 농약) 등에 대한 부가세를 영세율로 적용하여 면제시켰다.

특별히 후배 정치인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위정자는 국민 대하기를 사육사가 맹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것이다. 사육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여주고 관리를 해줘도 자칫 실수를 해서 맹수의 발등을 밟으면 사육사를 물어버리듯이 국민을 두려워하고 무섭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오늘 같은 난세난시에 임진왜란때 유성룡, 이덕형, 이항복 같은 문신 정치인이 없음이 아쉽고 이순신, 권율 같은 장수가 없음이 아쉽고, 종교인으로는 서산대사나 사명대사가 없어 아쉽다. 그렇지만 21대 국회가 개원해 새 출발을 시작하는 만큼 대한민국의 국운이 잘 풀리도록 노력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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