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5·18 40주년과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5·18 당시 해남에서도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7명 이상이 숨지고, 공수부대가 아닌 향토사단에 의한 조준사격과 암매장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고 있다. 또 한국전쟁을 전후로 경찰이나 우익단체에 의해 빨갱이로 내몰려 죽어간 희생자가 25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우리는 '4070'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 싣는 순서 |

① 5·18 40주년,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
② 5·18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③ 지워져 가는 기억들, 끝나지 않은 상처들
④ 한국전쟁, 그날의 해남, 그리고 해남인
⑤ '4070',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 5·18당시 군부대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헬기가 급파됐다. 사진은 군부대 입구.
▲ 5·18당시 군부대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헬기가 급파됐다. 사진은 군부대 입구.

풀리지 않는 '그날'의 진실 셋

1. 무장헬기는 왜,어떻게 출동했나
2. 2명 대 7명 이상, 사망자는 몇명
3. 조준사격과 암매장 여부 진실은
  

 

- 80년 당시 그날의 기억들

"공수부대 만행으로 광주사람 다 죽는다는 얘기가 돌았고 그래서 해남에서도 계엄군과 싸우자며 시위가 시작됐지. 3일 간의 짧은 역사였지만 그 일로 나와 형은 70여 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했고 다니던 직장도 잃었어. 아버지는 구명운동을 하다 건강이 나빠져 그 해 12월 돌아가셨지."

5·18 당시 24세로 해남군수협에 다니고 있던 김병일(64·현 해남5·18동지회 회장) 씨는 5·18의 아픈 기억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 해마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해남에서의 5·18민중항쟁은 80년 당시 5월 21~23일 3일 간의 역사로 이뤄진다.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를 통해 광주 상황이 알려지자 해남에서도 시위대가 구성됐고 광주사람들을 구하고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파출소와 경찰서에서 무기 획득에 성공했다. 또 인근 진도, 완도, 강진, 영암 등에 광주상황을 알리고 시위대를 모으는 일에도 나섰다.

군부대 앞까지 진출해 대치하는 상황이 빚어졌지만 큰 불상사가 우려되고 군민들이 불안해하며 광주로 가는 길도 막혀 갈 수 없다는 판단에 시위대는 무기를 군부대에 반납했다. 그러나 무기반납 후 뒤늦게 해남으로 돌아오던 일부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의 무차별 발포가 이뤄졌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해남에서 5·18과 관련해 풀리지 않는 진실은 크게 세 가지다.

80년 5월 22일 시위대 수백 명을 실은 차량 50여 대가 해남읍 백야리 군부대 앞으로 몰려가 군인들과 대치하다 돌아가 불상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무장헬기까지 출동하는 급박한 상황이 빚어졌다. 광주에서처럼 시위대를 향한 헬기 사격으로 대규모 살상이 빚어질 뻔 했다. 당시 어떻게 헬기가 출동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발포명령을 따르지 않은 고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지금의 지방경찰청장)처럼 해남에서도 불상사를 막은 숨은 영웅이 있다는 진술이 나오고 있다.

23일 우슬재와 상등리에서는 공수부대가 아닌 향토사단에 의한 군인들의 무차별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해자들과 증언자들은 7명 이상이 숨졌고 군인들이 투항하는 시위대에 수류탄과 조준사격을 가해 7명 이상이 사망해 군부대에서 암매장까지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군과 정부는 2명이 사망했고 우발적 총격이었으며 암매장은 확인된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80년 5·18의 기억은 뚜렷하지만 제대로 밝혀진 진실은 아직 없는 게 현실이다.

- 해남에도 무장헬기, 급박했던 당시 상황

80년 5월 22일 오후 3시 쯤 해남과 영암, 완도 등 곳곳에서 모인 시위대들은 차량 50대를 이끌고 해남읍 백야리 군부대 앞으로 몰려갔다. 광주로 가기 위해 무기를 더 구하기 위해서였다.

김병일 회장은 "군부대 앞에서 큰 도로까지 차량이 쭉 서 있었고 시위대와 군인들의 대치가 이어지자 시위대 대표단이 대대장을 만나러 갔어. 협상 과정에서 군 헬기가 30분 넘게 시위대 상공에 떠 있었는데 헬기에서는 '해산 안하면 발포하겠다'는 방송을 했고 대대장은 절대 무기를 줄 수 없다고 버티는 등 급박한 상황이었어"라고 말했다.

김 씨의 형인 김병조(70) 씨는 "그 때 시위대들은 헬기가 진짜 쏜다고 생각해 당황했지, 숨을 데도 없고 차로 막혀 있어 쏘면 죽는다는 공포감이 컸지. 나중에 들은 얘긴데 보안사나 헬기 조종사 중에 해남 출신 홍 모 대령과 민 모 중령이 있어 그 분들이 적극적으로 발포를 못하게 해 큰 불상사를 막았다고 전해들었어"라고 밝혔다.

당시 대대장이었던 장윤태 씨의 말은 다르다. 해남에는 시위가 없을 것으로 판단해 현역병들을 목포로 지원 보낸 상황으로 당시 부대에는 장교와 사병 10여명밖에 없었다. 장 씨는 "간간히 시위대들이 부대로 몰려와 큰 일 나겠다 싶어 방위병(당시 예비군) 100여명을 소집해 군인복장을 하고 부대에 배치해놨는데 어떻게 헬기가 온지 모르겠지만 헬기에서 쏴죽이겠다고 무전이 와 대대장 명령 없이는 쏠 수 없다고 했고 시위대를 설득해 결국 돌아갔지"라고 말했다.

막대한 인명피해가 우려됐던 무장헬기 출동이 누구 요청으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상부 발포명령을 거부했던 고 안병하 도경국장처럼 해남에도 또 다른 영웅이 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무장헬기가 외곽까지 출동할 때는 진압목적이 분명했을 것이다. 당시 광주 외에 장흥교도소는 교도소 폭동 진압으로, 여천산단은 공장 보호를 위해, 해남은 시위대 진압을 목적으로 출동한 것으로 보인다"며 "무장헬기 출동은 항공여단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보안사에 상황보고 등으로 남아있고 이를 가장 먼저 안 보안사 소속 누군가가 불상사를 막았을 개연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시위대 발포로 7명 이상 사망·암매장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서환기(59·현 5·18나주동지회 부회장)씨는 해남쪽 상황을 살피기 위해 5~6명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23일 새벽 우슬재를 지나가게 됐다. 또 10여명을 태운 화물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서 씨는 "군부대가 매복해 있는지 모르고 지나가다 집중사격을 받았는데 천둥소리처럼 총소리가 빗발쳤지. 우리 차는 바로 차를 돌려 위기를 면했지만 뒤따르던 화물차는 그대로 지나가다 무차별 사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1명이 죽고 1명이 다친 것을 목격했어. 이후 군부대로 끌려갔는데 부대 안에서 군인들이 관 2개를 이고 야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사망자가 더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라고 말했다.

당시 고3이었던 김병용(59) 씨는 23일 진도에 상황을 알리고 시위대 10여명과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해남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등리 국도변에서 매복해 있던 군인들에게 사격을 당해 폐쪽에 관통상을 입었다. 김 씨는 "투항하면 쏘지 않는다고 해 손을 들고 버스 밖으로 나갔는데 발포가 멈추지 않아 관통상을 입었다. 그 자리에서 1명이 숨졌고 여러 명이 다친 것을 목격했다. 다친 사람 대부분이 복부나 허벅지 등에 관통상을 입었고 수류탄까지 터졌다"며 "투항하는 민간인에게 의도적으로 조준사격을 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 80년 5·18당시 광주에서 온 시민군을 해남군민들이 맞이하고 있다.
▲ 80년 5·18당시 광주에서 온 시민군을 해남군민들이 맞이하고 있다.

해남 5·18동지회 김병일 회장은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똑같은 피해가 발생했고 당시 군부대에 들어갔던 목격자들에 따르면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관 4개를 군부대로 가져갔다거나 군부대에서 시신 여러 구를 봤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 명은 지난해 돌아가셨고 한 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증언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어 암매장 부분에 대한 정확한 진상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은 군인들에 의한 조준사격과 암매장이 있었고, 사망자가 최소 2명 이상이라고 밝히고 있는 반면 당시 대대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대대장인 장윤태 씨는 "암매장이나 추가 사망자, 조준사격 얘기를 들으면 기가 막히다. 대대장인 내가 모르는 상황에서 그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없다. 그 때 해남을 지키던 군인들은 방위병(예비군)이라 사격할 줄도 모르고 급박한 상황에서 우발적인 사격이 이뤄졌고 수류탄은 가지고 나가지도 않았다"며 "특히 상부에서도 비상시에 무릎 아래로 사격하라는 지시가 있을 정도로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해남에서는 5·18 민중항쟁과 관련해 증언자와 피해자가 넘쳐나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당시 대대장은 수습을 잘했다는 이유로 이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5·18진상조사위원회. 최근 광주시와 5·18기념재단 신고센터를 통해 2018년 6월부터 접수된 210건의 피해 사례 등을 전달받고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들어갔다.

해남에서의 5·18은 해남신문을 비롯한 언론의 보도를 바탕으로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과 암매장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가 이뤄진다.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그날의 진실들이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규명되기를 지역민들은 바라고 있다.

5·18기념재단 이철우 이사장은 "앞으로 광주에 진상조사지원단이 꾸려지면 해남과 관련한 내용도 조사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5·18과 관련해 전남쪽 진상조사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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