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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로 사는 삶
배충진 편집국장  |  cj-bae@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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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13  16: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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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리는 유명인 서화담이 길을 나섰다. 길을 잃어 오갈 바를 모르고 울고 있는 시각장애 청년과 마주쳤다.

왜 이리 울고 있는지 묻자 "다섯 살에 시력을 잃고 이십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오늘 아침 나절에 눈이 밝아 졌습니다. 천지만물이 환해져 기뻐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길이 그 길 같고 대문들이 서로 비슷해서 집을 찾을 수 없어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화담선생은 집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알려주겠노라며 "도로 네 눈을 감으면 너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소년은 눈을 감고 지팡이로 짚어가며 발걸음 가는대로 따라 자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창애에게 보내는 답장(答蒼厓)'이라는 편지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암은 자기 본분으로 돌아가기를 권면하고 있다. 현상과 감정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 본분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창애는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된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라는 말을 남긴 유한준이라 전해진다.

일대 문장가로 알려진 두 사람은 글쓰기에 대한 생각 차이가 있었다. 박지원은 글쓰기란 자기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지 형식에 얽매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유한준의 문장은 중국 한대, 시는 당대라는 고문주의에 더 방점이 찍혀 있었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만 생전에 서로 화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암은 경남 함양지역에 해당하는 안의현감 시절 쓴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서문에서 이명과 코골이를 예로 들고 있다. 아이가 자기 귀에서 소리가 나는 이명을 호소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또한 심한 코골이를 하는 사람을 옆 사람이 일으켜 깨우자 그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나는 코를 곤 적이 없소"라고 말한다.

코골이는 옆 사람 들은 다 아는데 골아떨어진 자기만 모르는 것이고 이명은 자기는 힘들고 괴롭지만 남들은 알지 못한다. 연암은 귀나 코에만 이런 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글짓는데는 이보다 더 큰 병이 있다고 말한다.

이명은 남들이 자신의 산고를 통해 태어난 작품을 알아주지 못함에 대한 불만과 자기도취, 코골이는 타인의 지적이나 비평에 발끈하는 속 좁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명이나 코골이 둘 다 사물을 잘 분별하고 헤아리는 슬기로움인 분수를 모름이다. 분수(分數)는 자기 처지에 알맞은 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분수(假分數)의 삶은 자기 역량보다 과장된 삶을 사는 것이다.

연암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울 경우에는 본질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진실을 보지 못하는 열린 눈은 망상(妄想)이다. 갑자기 뜨게 된 눈은 오히려 수많은 정보와 가능성 때문에 혼란과 불안을 초래한다. 이럴 때는 지팡이를 짚어가며 발걸음대로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

모두 자기 맡은 자리에서 분수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2020년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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