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돼지우리가 된 나의 화단.
▲ 돼지우리가 된 나의 화단.

해남 고향집에는 어린시절 내내 나만의 전용화단이 있었다. 6.6㎡(2평) 정도의 작은 터에 돌멩이로 화단 테두리를 만들었다. 아메리칸골드·분꽂·박하·범부채·사사·국화가 전부였다. 참, 딱지라고 불렀던 잔대도 있었다.

가끔 학교 화단에서 캐내 버린 꽃모종들을 종이에 싸서 10리길을 들고 와 심었다. 10리라 하면 콩과자 5원에 4개를 사서 아껴먹으면 올 수 있는 거리이고 5원하는 눈깔사탕 한 개를 물고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4월 5일 식목일마다 꽃을 심었지만 한두 달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고 대나무로 장난감 깎기, 딱지치기로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겨울에는 밤새 연을 만들고 연날리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고등학교 시절 도시로 나가 자취를 하는 사이 나의 작은 화단은 돌볼 사람도 없어 돼지우리로 바뀌었다.

삼형제가 함께 썼던 외양간이 딸린 사랑방에 어머니가 시집올 때 혼수품으로 가져온 이발소그림이 하나 있었다.

이발소그림이란 말 그대로 이발소에 있음직한 그림이다. 그림의 어디에도 화가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는 작자 미상, 한국인지 외국인지 구분이 안가는 국적 미상, 알프스산보다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한가한 농촌풍경이 펼쳐지는 장소 미상, 교회벽면에 유명화가의 그림과 달라도 너무 다른 출처 미상…. 그리고 나무를 그리기는 했는데 상상으로 그렸다는 티가 노골적인 그림이 바로 이발소그림이다.

이발소그림을 초중시절 10년 동안 잠잘 때마다 자연스럽게 쳐다보았다. 지금 보니 그나마 꽤 운치 있고 다른 이발소 그림에 비교하면 명화축에 속한다.

그 감수성 풍부한 시절 내내 본 거의 유일한 미술작품…. 아직도 창고로 쓰고 있는 내방에 걸려 있는 저 그림은 작년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모나리자보다 내게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해남에서 어린시절 꽃과 나무와 함께했던 많은 기억과 향수는 어른이 돼서도 나무를 새롭게 보게 했고 결국에는 나의 직업이 되고 삶이 되었다. 이제 해남의 나무는 나만의 나무가 아니다. 이젠 해남사람들의 기억속에도 나무 한그루 쯤 심었으면 하는 바람을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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