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손꼽히는 것이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사회현실 비판과 자주개혁이념이 3·1운동으로 이어져 민족의 등불로서 선각자, 선지자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근거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역사 이면에는 신사참배와 강제징용에 적극 협력했던 정춘수, 박희도 목사 등 기독교계 민족대표 변절과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제 강압 속에서 장로회총회는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보다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 하에 총후(銃後:후방에서)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정성)을 다하기로 기함"으로 끝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앙양심을 등지고 교인과 교회 안위를 위한다고 물러서 일제에 굴복하면서 이제는 스스로 전쟁협력자로서 자신의 충직함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내몰리게 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조직하여 교회 내에서 전승, 무운장구 기도회를 열고 국방헌금과 전사상자 나 유족을 위한 위문활동을 펼쳤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 하신 성경 말씀과는 달리 1940년대에 들어서는 기관총과 전투기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 까지 헌물로 바쳤다.

감리교, 구세단, 성공회 등과 천주교 역시 서로 경쟁적으로 협력하면서 성과를 내기에 급급했다. 김활란, 박마리아 등 여성기독교인 들은 징병유세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많은 기독교계 명망가들이 '임전보국단' 간부로 활동하며 조선인민 황민화와 전쟁협력에 앞장섰다.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자신의 과오에 대해 회개하고 거듭나기 보다는 민족분단 전쟁과 사상적으로 첨예한 갈등과 혼란 와중에 자신의 잘못은 유야무야 덮어두고 독재권력에 유착하여 반대세력을 용공으로 몰아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은폐해왔다.

자유당 정권기에는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4·19혁명 직전까지도 자유당정권에 대한 지지와 충성을 다짐했다.

5·16 군사 쿠데타와 3선개헌 파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로 확연히 분리되었고 보수진영은 정치권력과 발맞추어 대규모 구국기도회를 개최하는등 적극적 협력자로 나서면서 교회부흥과 성장을 이루어냈다.군사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찬양해온 기독교 보수세력은 촛불혁명과 남북평화체제구축 목전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와 영향력은 오히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신앙으로 시대 죄악과 맞서면서 농민,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앞장서야 함에도 하나님 대신 자본과 권력에 충성하고 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신사참배 문제, 교회나 교단차원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고 동조했던 과거 어두운 역사를 조사하고 정리하여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것은 한국교회를 살리는 일이다. 최근 한국천주교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과거사를 참회하고 사과했다. 신앙양심을 맑게 해야 비로소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고 자기갱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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