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면 옥동 소재 화신공예
호주생활 대신 옥공예 택해

▲ 황산면 옥동리에서 화신공예를 운영하며 옥공예를 지켜오고 있는 김육남 명인의 뒤를 이어 아들 김혁신 씨가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 황산면 옥동리에서 화신공예를 운영하며 옥공예를 지켜오고 있는 김육남 명인의 뒤를 이어 아들 김혁신 씨가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49년 옥공예 외길, 아들과 함께 걷는다

49년째 옥공예에 매진하고 있는 황산 옥동리 김육남(64) 명인의 외길 인생을 아들 김혁신(35) 씨가 함께 걷게 됐다.

김 명인은 강진군 칠량면에서 태어났으며 8살에는 도토리에 도장을 새길 정도로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아랫집 할머니가 자신의 친정인 황산면에서는 좋은 옥이 나오니 거기에 도장을 새기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전했고, 9살부터는 방학 때마다 옥돌을 주워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16살이 된 지난 1968년 황산 옥동리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옥공예에 빠져들었다. 당시만 해도 거리 곳곳에는 옥공예사가 가득했고 옥돌을 가공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1990년대 이후 옥공예가 사양길로 접어들어 사람들이 옥동리를 떠날 때에도 김 명인은 옥공예를 놓지 않았다.

꾸준히 자신만의 옥공예를 해오던 김 명인은 지난 2007년 대한민국 공예품대전(국전)에서 장려상을 받아 대한민국 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또한 2010년 제40회 국전과 2016년 제46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두 번 수상했고 2013년에는 한국관광명품 인증마크 사용승인서를 받았다. 이를 인정받아 2015년에는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31호로 등록됐다.

김 명인의 가장 대표적인 기술은 일도일각이다. 단 하나의 칼로, 밑그림 없이 단번에 그림을 새기는 것이다. 머릿속에 구상한 그림을 종이에 연필로 그리는 것은 못하지만 옥돌에 칼로 새기는 것은 자신 있다고 한다.

뛰어난 기술을 가진 김 명인이었지만 옥공예가 사양길에 접어들어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다. 때문에 김 명인 부부는 화신공예의 규모를 조금씩 줄여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호주 시드니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아들 김혁신(35) 씨가 돌연 귀국했다. 아버지의 옥공예 뒤를 잇겠다는 목표까지 세운 터였다.

혁신 씨는 옥동초등학교와 황산중학교를 졸업했으며 목포 홍일고, 조선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다 경영학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25살이 되던 해 누나가 있던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자유로운 호주의 환경에 반해 유학을 준비해 르꼬르동블루 요리학교에서 요리사 과정을 밟았다.

8년 가량을 호주에 머물며 요리사로 일하던 혁신 씨는 각별하게 지내온 레스토랑의 사장이 시한부 삶을 선고 받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하던 중 오팔로 유명한 애들레이드로 여행을 떠났고, 그 곳의 오팔 공방을 보며 아버지 김 명인을 떠올렸다. 호주에서 요리사로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전통 기술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김 명인은 생각지도 못한 아들의 결심에 다소 당황했으나 옥을 다루는 데에 감각이 있다고 생각해 사포질과 같은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고 있다.

특히 혁신 씨는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화신공예와 해남의 옥공예 작품을 세계에도 알리는 것을 꿈꾸고 있어 사라지는 해남 옥공예 문화에 힘을 보탤 것으로 기대된다.

혁신 씨는 "세계를 무대로 일할수록 과거의 전통을 잇는 것이 대단하다고 여기게 됐고 비전도 있다고 믿었다"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성실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명인은 "49년째 옥공예를 하면서 쉬었던 날은 6개월도 채 안 된다. 아들에게 뒷모습을 보여줄 때가 더 많았는데 갑자기 뒤를 잇겠다고 해서 놀랐다"며 "예술에 뜻이 있고 감각도 있는 것 같아 든든한 마음도 있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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