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해남공고 교사)

 
 

세상은 점점 친절해지는데 나는 친절이 불편할 때가 많다. ARS에서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인사하는 상냥한 목소리부터 백화점에 들어서면 복장을 갖춰 입고 몇 번이고 꾸벅 90도 인사를 하는 주차맨, 상냥한 웃음과 목소리로 쉬지 않고 쏟아내는 엘리베이터 걸 까지 가는 곳마다 친절은 넘쳐난다. 한 번도 편안하지 않다. 너무 진지한 친절이라서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말도 못하겠다. 여러 번 과분하게 친절을 받았으니 나는 무언가 구매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더 불편해진다. 인제 나는 물건 팔려는 상술의 위장에 속지 않아야겠다는 긴장을 하게 된다. 더 불편해진다.

손에는 칫솔을 들고 입안 가득 거품을 물고 있는 나에게 "어머나. 안녕하세요. 글을 잘 읽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글에서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게되었나요. 저도 그런 거 엄청 좋아해요" 입에 가득찬 거품으로 관심을 고마워하기는커녕 대답 한마디 할 수 없는 형편의 나에게 마구 자기말만 쏟아내는 이도 있었다. 불편하고 기분 나빴다. 복수를 꿈꾸는 금자씨의 친절에는 피눈물이, 가장 잔인하게 복수하고 말겠다는 일념이 감춰져있다.

상대가 이유 없이 과잉 친절을 담은 목소리를 날리면 긴장부터 하게 된다. 친절한 척, 귀여운 척 가성을 쓰는 이들도 있다. 이 사람이 무슨 카드를 내밀라고 이러는 거지? 긴장이 된다. 친절한 목소리는 거부하기도 어렵고 말의 내용에 내포된 문제점을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어렵다. 웃는 낮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맞다. 과잉친절자들은 그런 보호막을 방패로 두르고 서 있는 것 아닌가. 교언영색은 자신 없음, 내용 없음, 사실과 다름을 숨기는 기술일 뿐이다.

공자님 말씀이 맞다. 과도한 공손은 예의가 아니다. 상대를 속이고 있거나, 지갑을 열어라며 속으로는 조롱하고 있는 거다. 늘 친절하라고만 배운 우리들, 친절하지 못했다고 꾸중들은 일이 많았다. 과도한 친절은 남에게 부담주어서 내 목표를 이루자는 것일 수 있다. 대민 업무를 맡은 자의 친절도 마찬가지다. 그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안내와 배려와 도움을 주면 그 자세와 마음은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런 마음 생기지 않으면 사태와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친절한 일이다.

낯선 도시를 방문한 여행객에 친절을 베푼답시고 이말 저말 걸어쌓는다. 적정한 거리를 두고 혼자서 걷게 하고 필요한 요구에 대해서만 답해주는 띄엄띄엄한 거리가 더 편하다는 여행객이 많다. 잘 모르는 상대가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심기는 불편해질 수 있다. 친절한 말에 모른 척하기도 그렇고 일일이 응대해주기도 피곤하다.

돈과 권력의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굴욕을 주고 거기서 오는 쾌감을 즐기는 새디스트가 아니라면 그런 위장된 친절과 과도한 서비스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친절 못하겠으면 중립적으로 가자. 그게 더 낫다. 나날이 친절해지는 세상이 아무래도 나는 수상하다.

혼자서 생각해본다. (억지 친절로 본인이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 아닐 거다.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이고 상냥한 목소리를 쏟아내야 했던 그 주차맨, 엘리베이터 걸은 업무가 끝난 시간에 밀려올 피로와 공허함, 자기모멸을 어떻게 풀고 지내는지. 그것이 어디선가 폭발적으로 공격적으로 터져 나오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그런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굴욕이나 과도한 친절을 요구하는 자로 병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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