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염치가 사라진 사회, 염치를 돌아보지 않는 불고염치(不顧廉恥)의 파렴치한 사회가 되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는 사죄하고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했던 염치문화는 사라진지 오래고, 그나마 최소한 부끄러운 척이라도 하는 도덕적 겉치레 마저도 없어져 버린 사회, 또 그런 것이 일상화되다보니 그 상황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특혜에 대한 증거와 증인이 차고 넘침에도 줄줄이 불려나와 청문회장에서 끝까지 사실을 부인하고 최순실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이화여대 교수들의 행태와 파면 팔수록 줄줄이 불거져 나오는 증거 앞에서 대학의 신뢰와 사회적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버렸다.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직사한 물대포가 직접적 원인으로 사망에 이르렀지만 담당주치의는 '병사'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고 오히려 책임을 유가족에게 떠미는 염치없는 일이 인술을 펼치는 의료현장에서 발생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수많은 희생자와 고통받는 피해자를 나몰라라 하는 관리책임 부처와 제조회사의 행태 역시 염치라곤 찾아볼 수 없다.

권한정지된 대통령의 자기변명성 기자회견에 취재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들러리를 서서 받아쓰기를 하는 언론, 지상파 방송국 뉴스진행자가 하루아침에 청와대 대변인 노릇을 하는 것이나 권력자를 따라 이합집산과 띄어주기 식 보도행태에서 언론윤리와 염치는 찾아볼 수 없고 촛불민심은 민의가 아니다며 대통령을 군중재판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비교하는 얼토당토 없는 법논리를 펼치는 염치없는 법률가 앞에서는 아연할 수 밖에 없다.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과 바람을 무시하고 거대기업의 자기 이익을 위해 정권에 내놓은 말 값에도 못 미치는 돈을 일본으로부터 받고 어떤 이면합의를 해주었는지 오히려 가해자인 일본이 약속을 지키라고 설쳐대는 상황을 초래한 정권,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천일이 넘도록 그날의 행적을 제대로 소명하지 못하면서 자기는 할 일을 다했노라 큰소리 치는 대통령, 자기 뜻과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 관제 데모를 사주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고 억압한 공직자들에게서 염치란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다 정직하게 살아서는 잘 살 수 없고 정직해서는 돈벌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과 후계세대들에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눈치빠르고 약삭빠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촛불광장은 반성과 각성의 현장이다.

지난 마지막 국정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의 존재유무를 두고 국회의원 과 문체부 장관사이에 벌어진 18번에 걸친 핑퐁문답은 동문서답(東問西答)이 아닌 반복되는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국민의 속을 끓이고 근심으로 병나게 하는 동문서답(同問癙答)이었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없는데 국록을 받아먹는 것은 부끄러움이고(邦無道穀恥也)부귀를 누리는 것도 부끄러움이라(邦無道富且貴焉恥也)고 했고 맹자는 무릇 사람이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人不可以無恥) 라고 했다. 염치를 아는 사회,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그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이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