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 (북일면주민자치회장)

님 웨일스(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우· 1907~1997)가 1937년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을 만나 구술한 것을 1941년에 출간한 책이 '아리랑'이다.

그 사이 김산은 1938년 중국공산당에서 일본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 4년이 지나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은 둘로 쪼개져 독립했다. 전범국 일본은 갈라지지 않는 대신 그 희생자인 한국은 갈라졌다. 과연 38선이 잉태된 지 8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쪽에서는 공산당, 빨갱이 책임론만 난무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 괴뢰도당이라는 비과학적 언사가 정설로 굳어있을 뿐이다.

일찍이 1949년 6월,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미 의회 외교위원회 소속 의원 존 보리스(John Vorys)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애초에 38선 아이디어를 도대체 누가 상상해냈는지에 대하여 국무부와 군부가 함께 검토하여 답해 주기 바란다. 찰스 헬밐(Charles Helmick) 장군은 그것이 전장에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위원회에 나온 사람들은 그게 전쟁부(육군부의 전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증언한다. 나는 그게 얄타(회담)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38선은 누가 어디에서 정했단 말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

당시 그가 속한 위원회는 남한에 1억 5000만 달러 원조를 공여하고자 하는 행정부의 안을 심의하고 있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위원회에 출석한 트루만 행정부 사람들은 설명하지 못했다. 얄타회담에서 미, 영, 소 간에 분단 밀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너무 나간 음모론이다. 38선을 그었던 대령들 중의 한 사람인 딘 러스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건 소련과 미국 간의 타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국무부와 전쟁부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국무부는 가능한 넓은 지역의 코리아를 원했고 전쟁부는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38선이 결정된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기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도 연구가들은 그 수수께끼에 대해 묻고 있다. 어떤 학자도 38선의 최초의 발의자, 최초의 지시자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트루만이라고 단정하지만 추정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완범은 '한반도 분할의 역사'(2013)에서 미국 관계자들의 회고록이나 증언에서 그 누구도 최초의 발의자 혹은 지시자를 밝히지 않는 것을 고의적 은폐로 보고 있다.

"어느 날 심야의 격무에 지친 두 대령이 38선은 훗날 비극적인 것이 됐다"고 2013년 어느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한다. 이상한 일은 이 구절은 국내에 인용되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는 그게 비극이 되어 버릴 줄 몰랐었다고 고백하는데, 우리는 외면하거나 은폐했다. 반미주의자라는 낙인이 두려워서일까. 심지어 미국이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에게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주장하는 논자도 있다. 미국이 한 일은 무조건 옳다는 숭미주의자의 말만 판친다.

우리의 세상, 반쪽이가 됨을 사랑하는 우리들. 정신도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어 반쪽이 된 지 오래. 반쪽을 증오함이 자랑이고, 반쪽을 죽여야 함이 출세의 길이라는 착각이 완장이 되는 세상이다.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 평화주의자가 점점 이상한 세상이 되어가는 세상. 이 판국에 '통일'은 외로운 고독의 창고에 갇힌 지 오래다.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둘이 있으면 괴로운 세상은 우리의 가정도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길도 아니다. 우리의 주변은 반쪽이로 갈라져 있지 않은지, 그걸 모르는 나는 참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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