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의 꼰대'(나 때의 선생님)를 회상해본다. 중학 시절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교무실에 불려가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30~40대의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종아리는 시퍼렇게 멍들어 며칠 동안 4층 교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겨웠다. 부모님에게는 피멍 든 종아리를 숨겨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의 매'라고 여기고 원망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칠판의 수학 문제 풀이를 공책에 옮겨적지 않았다고 교탁으로 불려 나갔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맞고 웅크리자 '개긴다'며 또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지금도 그를 선생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교사의 탈을 쓴 '교단 깡패'로 교도소에서 회개해야 할 범죄자이다. 똑같은 폭력 교사이지만 하나는 추억, 또 하나는 응어리로 남는다.

학창 시절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었다. '갈 데 없어 너희를 가르치고 있다'는 자학을 제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내뱉은 교사이다. 자질과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무자격 교사이다. 그래도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주신 '은사님'이 많아 돌아가고픈 시절이기도 하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자격을 소지한 직업을 일컫는 말이다.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지혜와 평생의 올바른 길을 안내해주는 선생님을 스승이나 은사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한두 분의 스승이나 은사가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임금과 스승, 아버지의 은혜는 같은 것이라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했다. 굳이 '군사부'를 빌리지 않더라도 전통적으로 국가나 사회의 안정을 지탱하는 바람직한 형태로 정립(鼎立)이라는 표현을 썼다. 정립은 세 개의 발(三足)이 지탱하는 솥(鼎)을 의미한다. 하나라도 부러지면 솥이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긴장하면서도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정립의 사례는 숱하게 많다. 몽테스키외는 국가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삼권분립론을 주창했다. 법조삼륜(法曹三輪)은 검찰(공익 대표), 변호사(인권 옹호), 법원(양심에 따른 심판)을 수레바퀴에 비유한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 식, 주가 필요하다.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내세웠다.

요즘 교권이 무너졌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높다. 왜 교단이 비틀거리는 걸까. 교사에게 교권, 학생에게 학습권, 학부모에게 참여권 등 이른바 '삼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단을 지키는 선생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교권 추락은 아동학대 관련법이 부추기고 있다고 했다. 지도과정에서 학생이 무섭다거나 째려본다고 느끼면 정서학대로 취급받는다. 수업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을 깨울 때 불쾌하다고 느끼게 하면 안 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법 규정 때문에 방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관리자인 교장이 교사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규정에 난감하다는 것이다. 학부모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감정 노동자'를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작금의 학교 현장은 교사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아동학대법, 훈육하는 꼴을 못 보는 학부모가 가세한 형국이다. 이대로는 스승상(像)이 발붙이지 못한다. 백년대계(百年大計)의 교육이 떠나면 국가의 미래도 없다고 했다. 교사, 학생, 학부모가 삼위일체로 나아가야 교육도 바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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