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남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김을 먹었다고 하니 1500년 정도의 김 역사를 갖고 있다. 여느 나라보다 뿌리가 깊은 원조 국가인 셈이다.

바다에 잠수해야 했던 김 채취가 양식으로 발전된 시기는 갈린다. 경상도지리지(1425년 편찬)에 경남 하동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로부터 약 260년 전, 즉 고려시대인 1100년대 중후반 한 할머니가 섬진강 하구에서 나무토막에 붙어있는 김을 보고 착안해 죽목(竹木·대와 나무)을 수중에 세워 키웠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전남도기념물(제113호)로 지정된 광양의 김 시식지(始殖址)의 내용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인 김여익(1606-1660)이 광양 태인도(지금의 광양제철소 자리) 해변에서 참나무 가지에 붙은 김을 보고 1640년께 양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양식해 진상한 김을 인조가 먹어보고 김여익의 성을 따 이름을 붙였다는 말이 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에는 해의(海衣)를 옛 사람이 진이나 짐이라 했고 이 말이 변해서라고도 한다.

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지만 60~70년대까지만 해도 아주 귀한 식품이었다. 지금이야 김 한 장을 4~6개로 나눠 밥을 싸 먹지만 그땐 8~12개로 잘게 쪼개는 게 보통이었다.

먹기도 아까웠던 김이 이젠 우리나라 수산물 수출 1위에 오르면서 '바다의 반도체'라고 불리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수산물 전체 수출 규모는 31억5971만 달러(약 4조 원)로 이 가운데 김(6억5575만 달러)이 가장 많고 참치(6억252만 달러)가 뒤를 이은 것이다.

김은 해남에서 생산되는 수산물 중 단연 으뜸이다. 9611ha에 걸친 양식장에서 생산되는 물김은 전국의 15%를 점유하며 진도, 고흥에 이어 세 번째 주산지이다. 마른김은 30%가 나오고 가공산업의 메카이기도 하다. 해남의 물김 위판액은 연간 700억~1000억 원이다. 이 가운데 만호해역 김 양식장(1370ha, 174어가)이 120억~150억 원으로 20% 가까이 차지한다.

만호해역 김 양식장은 4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간 1982년 해남 어민들이 개발해 지금까지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 진도 어민(수협)과 수십 년에 걸친 어업권 분쟁은 지난해 말 대법원에서 기각(패소) 판결이 나면서 해남은 막다른 골목에 떠밀렸다. 법의 잣대에 맡기면서도 전남도의 중재와 당사자 간 협의가 내내 이어졌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엊그제 어란 어민들이 진도군청과 진도군수협을 찾아 상생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했다. 진도군수협이 만호해역 어장을 오는 9월까지 회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민들은 당장 다음달 말이면 이곳에서 김 채묘작업에 나서야 한다. 그야말로 낭떠러지에 선 형국이다. 만호해역에 맞닿아 있는 진도 고군 어민은 어업권 이양을 잔뜩 노리고 있다.

만호해역 어업권 문제가 여기까지 내몰리게 된 데는 '어떻게 되겠지'하는 안이한 대처가 자리한다. 그동안 많은 기회도 날려 보냈다. 정작 정치력이 필요한 현안에 정치권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젠 문제를 풀어야 할 물리적 시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충돌은 불 보듯 뻔하다. 솔로몬의 지혜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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