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내리는 장맛비를 보노라면 툇마루와 개떡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어릴 적 살던 초가집은 안방을 들어가려면 거쳐야 하는 툇마루가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어머니가 해주신 개떡을 먹곤 했다. 개떡은 설탕이 귀했던 시절 감미료인 사카린을 넣은 밀가루 반죽을 솥에 쪄서 만든다.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 개떡은 장맛비와 찰떡궁합이자 호사이기도 했다. 개떡에 쓰이는 '개'는 동물이 아니라 '형편 없는'이라는 의미이다. '개떡 같은 인생'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는 표현을 빌려보면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장맛비는 소금쟁이 추억도 날라다 준다. 어릴 때 소금장수라고 잘못 부른 소금쟁이는 비가 내린 후 웅덩이나 건물 옥상의 고인 물 위를 잽싸게 돌아다니곤 한다. 수십 미터 높이의 옥상에 어떻게 왔는지 불가사의했다. 날개가 있을 줄 까마득히 몰랐다. 아무리 가볍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아 더 신기했다. 다리의 잔털과 기름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소금쟁이라는 이름은 소금장수와 비슷한 생김새나 짠 물가에 서식해 붙었다고 하니 소금과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장맛비는 저마다 나름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모두의 공통분모로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한가운데 자리한다. 물 관리(치수·治水)가 허접했던 옛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조상들은 가뭄보다 장마를 더 힘들어했다. '삼 년 가뭄에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속담이 그렇다. 피해도 더 심각하게 여겼다.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가 이를 말해준다. '칠월 장마는 꾸어서 해도 한다'는 속담은 장마가 7월에 집중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에 '장마철'을 더해 오계절이 있다고 한다. 이젠 장마철을 '제5의 계절'에서 빼내야 할 때이고, 사람이 가장 살기 적합한 온대기후의 특징인 사계절도 경계가 무너져간다.

전통적인 장마는 큰 덩치의 장마전선이 천천히 북상하면서 시작돼 오랫동안 머무는 구조이다. 지금은 이런 패턴이 아니다. 작은 덩치의 저기압이 강한 비를 뿌리고 재빨리 빠져나가고 단기간의 폭염이 덮치기를 반복한다. 극한 호우(폭염)에다 유독 밤에 쏟아진 야행성 폭우가 기승을 부린다. '게릴라전선'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기상청도 500년 넘게 쓰던 장마라는 용어를 다른 말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장마라는 단어는 오랜 기간(장·長) 이어지는 비(마)를 뜻하나 최근의 현상은 변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열대지방의 특징인 우기(雨期)라고 지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우리나라 기후도 이제 '온대'라고 말하기 쑥스럽게 됐다. 온대와 열대 사이의 아열대기후가 이미 상륙했다고 본다. 아열대의 정의는 갈리지만 8개월 이상 평균기온이 10도 이상으로 주로 설명된다. 제주도는 이미 접어들었고 한반도 평균기온보다 1도 정도 높은 해남은 2~3년 후 아열대기후에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모든 게 기후변화이자 기후위기에서 비롯된다.

엊그제 가뭄 걱정을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물 폭탄 걱정으로 바뀌었다. 요사스럽기도 하다. 장마가 잠시 물러가고 폭염에 찌든가 했더니 다시 비 소식이다. 폭우도 폭염도 모두 재해이다. 다만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재해이다. 그러니 누굴 탓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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