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래질을 마치고 황토물로 넘실대는 해남 들녘은 2~3주 지나면 연초록의 어린 모 천국으로 변신할 것이다. 영농철을 맞아 마침 단비도 내려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볼썽사나운 걱정도 덜게 됐다.

모내기가 이미 출발을 알렸고 마늘, 양파 등의 밭작물은 수확에 들어가면서 해남의 농촌은 바야흐로 농번기에 접어들고 있다. 모내기 한철을 보내고 성하(盛夏)의 계절이 다가오면 휴가를 맞아 농촌을 찾은 도시민에게 잠시나마 목가적(牧歌的) 풍경도 선사할 것이다.

이런 농촌 들녘의 평화로운 모습에는 농민들의 땀이 배어 있고 다른 한 켠에는 애간장도 녹아있다. 농번기에 접어든 요즘 농촌에는 귀하디 귀한 일손 구하느라 전쟁이 치러진다. 젊은 사람은 씨가 말라가고 일할 나이가 넘어선 고령층만 농촌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불법이든 합법이든 가리지 않고 외국인 모시기에 혈안이다. 치솟는 인건비 타령도 일손이나마 구해야 해볼 수 있는 처지이다.

농촌의 인력난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젠 한계점에 다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비극은 잉태되고 있다.

얼마 전 산이면에서 벌어진 참극은 농촌 현실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간척지에 농사를 짓는 주민은 모내기를 앞두고 평소 친구처럼 지내는 같은 마을 지인에게 외국인 노동자 2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지원해줄 노동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서운한 감정을 갖던 차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불법체류 외국인 알선 사실을 신고하겠다고 했다. 약점을 건드리자 격분에 휩싸여 외국인 노동자 지원을 요청한 주민을 농기구로 머리를 때려 숨지게 한 것이다.

이번 끔찍한 사건에 여러 요인이 얽혔다고 하더라도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농촌의 구조적인 인력난이 자리하고 있다. 벼농사의 기계화가 90% 넘는다지만 일손은 있어야 한다. 모내기에 모판을 옮기고 이앙기에 싣는 작업은 사람 손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농촌 일손의 단비 역할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 구하기도 좀체 쉽지 않다. 때가 있는 농사일에 당장 일손이 필요한데 외국인이 합법인지 불법인지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이번 사건에는 불법체류 외국인 문제가 깔려있다. 법무부가 영농철을 앞두고 불법 체류 외국인을 대대적으로 단속하면서 농촌을 한바탕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법체류 외국인 알선을 신고하겠다는 으름장이 가해자를 격분하게 한 것이다. 정부의 대책 없는 단속이 힘없는 농민에게 던져준 좌절감 또한 얼마나 클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농사짓지 말라는 것인지, 농민이 우리나라 국민이기나 한지 헷갈리기도 할 만하다.

인력난이 어디 농사에 한정되겠는가. 해남의 어느 식당 업주는 장사가 잘되고 아니고를 떠나 종업원을 구하지 못해 당분간 음식점 문을 닫아야 했다. 그동안 알음알음 구하거나 인력소개소를 통했는데 이마저도 힘들어졌다. 외국인도 요즘엔 숙식을 제공하고 270만~280만 원의 월급을 줘야 한다. 광주나 목포 소개소를 통해 내국인을 고용하려면 30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주말·휴일엔 일할 사람이 없어 영업을 중단하기도 한다.

영농철마다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농민의 눈물은 누가 닦아주고 어루만져주어야 하나. 풍년이 더이상 축복이 되지 못하는 시대는 누굴 원망해야 하나. '농사 못 짓겠다'는 농촌의 절박한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공허하게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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