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교사)

'학교는 거짓말쟁이다, 교과서에는 영혼이 없고 학교에 교육이 없다.'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아닌가? 이런 도발적인 발언으로 시작하는 것은 학교에서 희망을 찾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지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70년대나 2000년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러서도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무엇보다도 승자독식을 즐기는 기득권과 용이 멸종한 개천에서 용 나기를 기다리는 비기득권층의 우매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죽은 지식을 나열한 교과서에는 영혼이 없다. 창조적 삶을 꿈꾸어야 할 학생들에게 교과서는 맞지도 않는 답을 제시하고 암기 순위로 서열화한다. 학생들은 점점 삶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줄 세우기 시험에 그마저도 선다형으로 답을 정해놓고 골라찍기를 시킨다. 웃기지만 이걸 객관식이라고 우긴다. 그 시험이 학생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최근에 학생들과 정의(正義)에 대해 수업을 하였다. 수업하며 생활이 되지 못하는 공부는 시간 낭비라고 매시간 강조하였다. 그 단원이 끝나고 '소수자 우대정책'을 질문하였을 때 많은 학생이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 롤스의 정의를 얘기할 땐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을'이란 전제에 동의하며 소수자 우대정책의 당위성을 강조하던 아이들이었다. 특히 입시에서 지역균형선발에 전폭적 호응을 하던 아이들이 불과 며칠 만에 자신의 주장을 배반한 것이다.

학교 공부 잘하는 건 인간의 수많은 능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런 지능을 타고난 건 요행이고 운일 뿐이다. 타고난 배경은 노력의 대가가 아닌데도 운 하나로 많은 것을 획득하고 군림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또 그림 잘 그리는 능력은 수학 잘하는 능력보다 낮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생태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아이는 왜 평가대상에서 멀어져야 하는가? 그 아이들도 영어 수학 잘하는 아이만큼은 인정받아야 하지 않는가? 왜 학교의 절대다수인 학생은 학교운영위원이 되지 못하는가? 옷 입을 자유도 없는 학생들이 진정 학교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강제로 하는 자율학습은 언어 사용의 형용모순 아닌가? 차라리 강제 학습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라.

우리 교사들은 어떤가? 교사는 길을 잃었다, 실력도 좋고 열심히 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그리고 학부모들은 또 얼마나 지극정성인가? 그런데 무엇을 위한 지극정성일까? 대학은 정해져 있고 어느 아이가 들어가면 다른 아이는 떨어진다. 하나 묻자. 내가 가르치는 아이만 제자인가? 이웃 학교, 강원도나 제주도 아이들은 제자가 아닌가? 내 학교 아이 하나만 잘 되면 훌륭한 교육활동인가? 왜 우리 아이들이 다 잘 되게 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는 나몰라라 하는가? 제로섬 게임을 하면서 상대평가로 실패자를 양산하는 교육을 교육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대안이 뭔데? 묻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입시의 대안은 대학평준화라고 이미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다. 교육은 상호 성장이다. 공동체 구성원으로 서로 행복해지기 위한 도움과정이다.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학교와 교육은 지옥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짓이다. 그리고 해남 아이들은 해남의 미래다. 이들이 해남에 대한 상상을 하도록 해야 한다. 학교 수업에서 해남의 지속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그들의 상상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그들의 꿈과 행복을 위한 창조적 활동을 학교에서 준비하도록 도와야 한다. 교육이 아이들을 도와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모두가 뛰어들 때 비로소 교육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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