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상(편집국장)

오영상(편집국장)
오영상(편집국장)
고인을 20여년 전에 광주 금남로에서 처음 만났다. 지역일간지 수습기자로 있을 때다. 1988년 5.18청문회이후 금남로는 시국집회가 매일 열리다시피 했다. 전두환·이순자 구속요구 집회부터 금남로 시작점 전남도청앞에서는 농민시위도 있었다. 한 해 전 해남에서 열린 '수세폐지결의대회'가 인근 나주를 거쳐 전국으로 번졌다. 고추값 폭락으로 인한 고추싸움도 한창이었다. 그 중심에 고 정광훈 의장이 계셨다.

어느 날 집회와 시위 취재로 지친 몸을 이끌고 농민대표들을 만났을 때였다. 몇 분이 제대로 보도하라고 핀잔을 주었다. 1987년 국민주로 출발한 한 중앙일간지를 본받으라면서 불만의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뜩이나 지쳐있는데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나름대로 시위현장을 열심히 뛰어 다녔으니 피 끓는 젊은 기자의 표정이 어떠했겠는가. 맞대응을 하려는 찰나 고인께서 웃으시면서 "우리 함께, 함께 열심히 뜁시다"라고 다독였다. 핀잔을 주던 농민들도, 열 받은 기자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큰형님 같고 이웃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서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느꼈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그 분이 해남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시절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즉, 집시법이 기승을 부릴 때다. 최루탄과 흰색 헬맷을 쓴 소위 '백골단'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이 자행되던 시절이다. 그러나 굴하지 않은 고인의 농민과 민중을 향한 애정은 계속됐다. 도청 벼야적시위를 끝으로 현장에서 직접 뵙는 것보다 보도사진을 통해 뵐 수 있었다. 여의도농민집회, 국회 앞 집회 모습도 서울주재기자의 전송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민중운동의 지도자로 다가 오셨다.

'아스팔트 사나이', '아스팔트 농사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인께서는 늘 현장에 계셨다.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석, 축지법을 써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전라도사투리로 연설, 집회에 참가 한 전국농민들의 피로를 날려버렸다. 90년대 초반 4년간의 옥고를 시작으로 전국농민대회와 한미FTA저지 투쟁과 관련해서 또 옥고를 치렀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68세의 연세에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국제엠네스티로부터 양심수로 지정되기도 하셨다한다.

지난해 말 편집국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읍내 한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고인을 찾아 뵀다.  특유의 미소로 '건전한 해남사회'를 강조하셨다. 해남에 거주하시면서 해남사회로 무게 중심을 옮겨 가시는 듯했다. 그리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없었지만 여전히 강렬한 눈빛으로 지역언론의 역할을 주문하셨다. 아마 고인께서 해남에 거처를 마련하고 해남살이에 더 비중을 두고 있으나 잇단 군수 구속과 잦은 재·보선으로 사분오열된 해남사회를 걱정하신 모양이다. 고인을 보내면서 지역언론인으로서 역할을 다시한번 다짐해 본다.

고인께서 온 몸으로 막고자 했던 FTA의 파고가 몰려오는 이때에 갑작스러운 소식에 농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잇단 농정실패와 농업을 무시하는 정책에서 상처 받고 또 아스팔트로 나가야 할 농민들의 슬픔이 해남에서 광주까지 운구행렬이 지나는 곳곳에서 묻어난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나 갈 것을 한결같이 다짐한다. 정의장님, 아직 남은 과제는 산 자들에게 넘겨주시고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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