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창 달량진은 잦은 왜구 침입으로 고통 받았다

일본은 북평 남창 달량진을 자주 침범하며 서남해안을 유린한다. 조선정부는 서남해안으로 왜구가 자주 침략하자 북평 이진에 수군진을 설립한다. (제주 뱃길이었던 이진에는 지금도 제주도 현무암 돌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은 북평 남창 달량진을 자주 침범하며 서남해안을 유린한다. 조선정부는 서남해안으로 왜구가 자주 침략하자 북평 이진에 수군진을 설립한다. (제주 뱃길이었던 이진에는 지금도 제주도 현무암 돌을 흔히 볼 수 있다)
왜구가 창궐했던 려말선초,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을 중심으로 각처에 수군진이 설치된다.
해로의 요충지인 해남에는 송지 어란과 북평면 남창의 달량진에 이어 전라 수영(1440년) 그리고 북평 이진포에 진(鎭)이 설치된다.

처음의 수군진은 내륙방어를 위해 육지 안쪽에 있다가 왜구들이 서해안을 자주 침범하자  남쪽해안으로 전진 배치된다. 이와는 반대로 해안고을의 읍치들은 보다 내륙인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때 해남도 현산 고현에 있던 읍치를 삼산 계동(1412년)으로 이동했다 다시 현재의 읍으로 이동한다.

해안가에 설치된 수군진은 해안방어체제를 위해 설립되지만 점차 봉화와 목장관리, 세곡선 운송, 국가 송전(松田)관리, 연해민 통제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달도→달량→고달도→남창

달량진은 현 북평면 남창리에 위치해 있는데 완도 달도(達島)와의 사이의 물목임을 알 수 있다.

달량의 원지명은 '달도'였으나 1478년 '달량'으로 개명되고 이후에 완도의 '달도'와 구분하기 위해 '고달도'라 불렀다. 이곳 수군진의 설치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종실록 6년(1406년) "여색을 탐한 설연(雪然)을 해남현의 달량진 수군으로 편성시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개국 무렵에 이미 달량진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달량은 해남현에 속한 수군진이었다가 나중에 영암으로 이속된다.
세종실록 11년(1429) 4월, 전라도 각처의 수군진의 병선들을 전면 재배치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전라수영인 대굴포의 병선은 난량(화산면 연곡)으로, 난량의 병선은 달량으로, 달량의 병선은 마량으로 연쇄 이동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북평 이진진과 우수영의 수군진은 보이지 않는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달량은 영암군의 남쪽에 있으며 중선 7척, 맹선(판옥선 이전 군함) 2척과 군사 519명, 뱃사공(선장)4명을 거느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달량진의 성(城) 축조는 연산군 5년(1499년) 7월 손번((孫蕃) 등이 "축성은 그 완급을 가려야 하는데 마도(馬島 강진 마량)와 달량(達梁) 등은 적의 침략을 받는 가장 긴요한 곳이므로 금년에 쌓아야 한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달량진은 중종16년(1521년)에 이르러 완도 가리포로 이전하게 되자 만호진(종4품)에서 최하급인 권관진(종9품)으로 격하돼 운영된다.

그리고 1627년 달량진 대신 북평 이진에 수군진이 설치되자 달량진은 환곡을 위한 곡식 창고였던 남창(이진창)으로 전환한다. 

달량진사변, 왜 기만전술에 울었다

해로의 요충지였던 달량진은 왜구의 침략을 자주 받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자세히 서술돼 있다. 

성종 14년(1483년) 2월 말, 왜선 수척이 달량에 이르러 상선(商船)과 무명 50필, 쌀 30여석을 약탈하고, 3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다. 또 중종17년(1522년)6월 왜선 12척이 침입하였는데 이때 왜인 80여명은 깃발을 세우고 징과 북을 치면서 상륙했다.

이에 달량진 수군이 화살과 포를 쏘니 왜인은 일단 북쪽으로 물러갔다. 다음날 왜구 세 명이 뒷산에 올라 "왜변이 일어났다"고 소리치자 성안의 군사들이 놀라 넋이 나갔고 이때를 이용해 왜선이 다시 침입했다. 방어하는 조선수군의 화살이 모두 떨어지다 이번에는 진무(鎭撫 종6품 무관벼슬)가 "수영·병영의 군사가 곧 온다"고 소리쳤고 이에 놀라 왜적이 물러갔다. 그러나 병영의 우후 권수영은 적이 물러간 지 5일후에서야 달량진에 나타났고 적이 보이지 않자 그대로 퇴각해 버린다. 달량진에서 물러난 왜적은 장흥 회령포와 완도 가리포 쳐들어가 그곳을 난도질해 버린다.

조정에서는 왜구들이 우리말을 모두 잘하였고 징과 북을 치면서 침략한 수법이 좀도둑의 소행은 아닌 듯하다며 불안해했다.

임진왜란 전초전이었던 달량진 사변

중종10년(1555년) 왜선은 다시 달량진을 침범한다. 이 전쟁을 을묘왜변 또는 달량진 사변이라 칭하는데 이때 왜선 70여 척은 달량을 침범한 후 강진 장흥 완도 진도 영암 등을 침탈한다. 서남해안 일대를 장학한 왜구가 서울까지 쳐들어간다는 말에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그만큼 달량진 사변은 대규모 왜변이었다.

달량진 사변을 일으킨 왜선 70여척과 6000여명의 왜구들은 일본의 정규군이 아닌 한중일 삼국의 해안을 약탈하는 해상족들이었다.

해적이었던 이들은 중국 명(明)나라의 남쪽해안을 약탈한 후 달량을 침범한다. 5월 11일 달량진의 앞바다에 정박한 왜구들은 주변상황을 염탐한 후 11척의 배를 이진포와 달량포에 먼저 상륙시킨 후 성 아래의 민가를 불태우고 성을 포위한다. 달량진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고작 40여명이었고 이때 완도 가리포 첨사 이세린은 성을 버리고 10리 밖 굴속에 숨어버린다. 이세린은 군량미 100석을 배에 실었다 이도 적에게 빼앗기고 만다.

달량진 사변의 급보를 접한 강진 병영의 절도사 원적(元績)은 군사 200여명과 장흥 부사 한온(韓蘊),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급히 달려오지만 참패하고 만다.

원적과 한온 등 모든 군사가 살해되고 항복한 이덕견을 통해 왜구는 "서울까지 범하겠다"는 편지를 서울로 보낸다.
또 전라 우수사(정3품) 김빈(金贇)과 광주 목사 이희손(李希孫), 해남현감(종6품) 변협 등이 뒤늦게 구원하러 오지만 모두 연패하고 만다.

거듭된 패전에 조정의 대신들은 날마다 비변사(備邊司)에 모여 대책을 논하지만 어느 누구도 방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승세를 탄 적들은 진도의 남도포와 금갑포, 완도 가리포와 마도진, 회령포 외에 병영(兵營)과 강진, 장흥 등을 마구 분탕질했다.

해남읍성도 공격을 당했으나 변협만은 수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장수들은 성안에서 원적이 살해되었음을 알고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해 버렸다.

왜구들은 무인지경이 된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질러 서남해안은 한 순간 화염에 뒤덮었고 군량과 무기(軍器) 등을 모조리 약탈당했다. 마을마다 들어온 적이 겨우 3∼4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항하는 사람이 없어 연해(沿海)의 진(鎭)과 고을들은 모두 텅 비어 버렸다. 왜구들은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에 나누어 싣고 영암 향교에 들어가 진을 쳤다.

이때 전라방어사(종2품) 김경석(金景錫)은 겁을 먹고 영암읍성으로 들어가 사태만 관망했다. 전주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싸우기를 청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군교(軍校)들이 '만일 패하게 되면 혼자 죄를 받아야 한다.'고 엄포하자 김경석은 할 수 없이 휘하의 장수들에게 나가 싸우라고 말할뿐 자신은 성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장사(將士)들은  전주부윤 이윤경의 지시에 따라 결전에 임해 적의 머리 100여 급을 베는 등 적을 무찌른다. 이때 왜적은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강진 작천과 강진읍을 분탕질한 후 자신의 나라도 되돌아간다.

제주 입출항구였던 이진 

북평 이진진(梨津鎭)은 달량에서 남쪽으로 불과 800여m 떨어진 수군진으로 사실 달량과 동일지역 포구이다. 마을이 배 모양 형국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진성의 모양도 병선의 외곽선과 흡사하다.

이진진은 달량진 사변 후인 1597년 종9품의 권관진(鎭)이 설치되었다가 1627년 만호진으로 승격됐다. 정유왜란 무렵 이순신 장군이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 중 착란증세로 (1597년 8월 20~24일) 머무른 곳이다.

조선시대 제주도 말은 이진에서 상륙하고 달량진이 있었던 남창(=이진창)은 제주도에 공급할 식량을 선적하는 포구 역할을 했다. 이진 외에도 해남의 공식적인 제주도 입출항포구는 황산 관두포와 입암포 그리고 화산면의 삼촌포였다.

조선시기 제주도를 왕래하는 제주도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임금의 명령을 받은 관리)은  달량(古達島)에서 바람을 기다렸다. 남창의 해월루(海月樓)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있었는데 관리들은 이곳에서 쉬면서 떠날 날을 기다렸다. 해월루에서 쉬는 관리들의 대접은 해남과 강진 현감이 번갈아 가며 맡았는데 해월루가 있는 북평 인근마을 주민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렇게 되자 정조18년(1794)에 이르러서는 영암 달량(古達島)과 강진 남당포(南塘浦 병영의 군량 3천석 창고가 있었음), 해남 관두포(館頭浦)를 차례로 이용하게 했고 그 접대도 해당고을에서만 맡도록 했다.

임란당시 어란진은 송지면에 없었다

어란진에 관한 기록은 태종실록 17년(1417) 5월 '조운 시 관용 물건을 남용한 어란량 수군만호 송안(宋安)를 파직'하라고 기록하고 있어 어란진은 달량진과 함께 조선 초기에 이미 설치 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429년의 실록에는 '난량'이라고도 기록돼 있어 당시 어란진은 지금의 송지면의 어란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세종실록지리지(1432)에 의하면 "삼촌포(화산면 연곡, 읍에서 25리)가 어란포였다. 만호진(종4품)으로 중선 4척과 군사 480명, 뱃사공 4명을 거느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1412년 삼산면 계동으로 이동된 해진읍치를 방어하는 진으로 화산 연곡에 어란진을 설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어란진은 읍에서 34리(화산면 가좌리 건지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 16년(1434)6월 19일 소윤 이길배의 보고 내용 중 "어란 수군진(화산면 연곡)은 큰 바다와 멀어 왜구 방어가 어렵기 때문에 진도와 각 포구 방어를 위해 진도가 보이는 삼내도(화산의 삼마도로 추정)로 어란의 병선을 이동해야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국여지지'(1656)에도 "해남읍에서 34리 떨어진 곳에 어란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임진란(1592~1598)시기에 어란진은 송지면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 송지면(당시 영암군)으로 이동했을까. '여지도서'(1757) 영암군조에 '군(영암읍)의 남쪽 150리에 있고 석성이 있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1656~1757에 해남 화산에서 영암군역인 송지 어란으로 이속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1895에 대왜 해안방어체제는 무너진다. 이로서 장장 5백여 년 세월을 견뎌온 조선의 수군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북평 남창에 있는 달량진성 흔적.
북평 남창에 있는 달량진성 흔적.

1955년 북평면 남창 달량진으로 쳐들어 왔던 왜구는 강진·진도·완도·장흥지역까지 유린해 버린다. (북평 남창 앞바다)
1955년 북평면 남창 달량진으로 쳐들어 왔던 왜구는 강진·진도·완도·장흥지역까지 유린해 버린다. (북평 남창 앞바다)
제주도 입출항구였던 이진성은 우수영으로 향하던 이순신 장군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제주도 입출항구였던 이진성은 우수영으로 향하던 이순신 장군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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