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가 창궐했던 려말선초,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을 중심으로 각처에 수군진이 설치된다. 해로의 요충지인 해남에는 송지 어란과 북평면 남창의 달량진에 이어 전라 수영(1440년) 그리고 북평 이진포에 진(鎭)이 설치된다. 처음의 수군진은 내륙방어를 위해 육지 안쪽에 있다가 왜구들이 서해안을 자주 침범하자 남쪽해안으로 전진 배치된다. 이와는 반대로 해안고을의 읍
'울돌 울두'는 한자표기로 '명량(鳴洋)'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지역민들 내에서는 '울둔벙 울둠벙'으로 통했다. '사나이의 바다'인 명량수로는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 바다 즉 우수영 포구~황산의 입암포 인근까지의 바닷길을 말한다. 뱃길이 매우 험해 태안의 안흥량, 강화도의 손돌목과 함께 조선 3대 험한 수로로 일컬었지만 경상도와 전라좌도의 모든
마포(馬浦)라는 생소한 이름은 마산면의 옛 지명이다.1914년 산일면(학의리의 서쪽 15개 마을) 일부와 통합돼 마산면이 된 것이다. '마포면'은 지명에서 보듯 그 중심지는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큰 물길인 계곡천에는 별진포와 둔주포가, 옥천천 상류에는 백제시기의 옛 무덤과 진터산성 관련 거점포구가 있었을 것이다. 두 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맹진포, 그
한반도의 서남단에 있는 화원반도는 L자 모양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모서리로 그 뱃길은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다.동진하면 일본, 남서진하면 중국 상해, 북진하면 한양과 중국 북부 그리고 화원땅끝을 돌아 내륙으로 진입하면 영산강을 따라 영암과 나주에 이르기 때문이다.화원반도에서는 원삼국시기의 패총 및 4C 대형옹관과 삼국시대의 대형고분
해남반도를 두 쪽으로 가르는 두륜산맥의 동쪽은 서쪽에 있는 옛 해남과는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고 있다. 이곳은 두륜산맥이 상호왕래를 막아 이질적인 문화권이 형성되었다.강진만 입구의 서남쪽에 위치한 북일지역은 간척으로 인해 육지화 되었지만 신방리 고분군 인근까지도 한때 바닷가였다. 북일 내동간척지 남쪽의 밭섬에도 고분 두기가 있는데 고분의 위치상으로 보아 이들
해창만은 1988년 완공된 고천암 간척지 동쪽의 해남읍과 삼산면, 화산면 일부의 옛 바다를 일컫는다. 중심 물길인 어성천은 고대~근세까지 해남 고대 토착민과 고대 일본인, 진도민의 생명을 연결해준 생명의 물길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 해진군과 녹산현, 사라향의 치소가 형성되었고, 4C전후에는 옹관토착세력의 중심지와 일본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다.역사기록에는
해남의 역사시대는 언제부터일까. 조선이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려이전 해남에 관한 직접 기록은 지리지 외에는 거의 없고 조선초기의 역사마저도 빈약하다. 고 해남 땅은 현재의 현산·화산·송지면 일부분 즉 백포만 인근지역이었으며 고려시기에는 감무(하급의 지방관)도 파견되지 않는 영암군 직할의 작은 현이었다. 결론으로 고려시기까
656년 3월29일에 부임한 전라우수사 이익달은 가을철 대규모 특별해상훈련을 우후 신숙에게 지시한다. 이 지시에 따라 전라우도 수군에 편성된 고을 즉 금성·영암·무장(고창서부)·강진·부안·진도 등 전선들이 총동원된다. 17곳의 수군진을 제외한 별도의 훈련이었다. 여기에는 해당고을의 군수들을 포함
화원 월내마을이 원래 땅끝이다. "세발낙지는 발이 3개이다" 전라도 사람이 힘주어 말한다면 서울사람 태반은 갸우뚱하면서도 믿는다. 만약 그런 세발(三足)낙지가 있다면 해남의 땅모양은 영락없이 세발낙지를 닮았다. 몸통은 해남읍이고 세발(三足)은 산이·화원·해남곶(串=반도)이 바로 그것이다.화원반도의 옛 지명은 황원곶
21C 동북아 해양시대를 맞아 찬란했던 옛 해남의 해양문화를 발굴,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취적이고 개방적, 국제적인 해남의 미래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연재한다. 해남포구 고대 한·중·일 교류 거점항 역할고대도시 백포, 청자단지 화원 해양문화 꽃피워한국은 '방방곡곡(坊坊曲曲)'일본은 '진진포포(津津浦浦)'한반도는 중국 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