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삼별초·이순신도 명량수로의 중요성을 알았다

명량 수로는 동해와 남해의 물류를 한양으로 이송하는 해로인데다 일본과 제주도를 잇는 해로여서 옛날부터 중요한 바닷길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물살이 센 협수로 전쟁시 요충지 역할을 했다.( 진도에서 바라본 울돌목과 우수영 일대) 
명량 수로는 동해와 남해의 물류를 한양으로 이송하는 해로인데다 일본과 제주도를 잇는 해로여서 옛날부터 중요한 바닷길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물살이 센 협수로 전쟁시 요충지 역할을 했다.( 진도에서 바라본 울돌목과 우수영 일대) 
'울돌 울두'는 한자표기로 '명량(鳴洋)'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지역민들 내에서는 '울둔벙 울둠벙'으로 통했다. '사나이의 바다'인 명량수로는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 바다 즉 우수영 포구~황산의 입암포 인근까지의 바닷길을 말한다. 뱃길이 매우 험해 태안의 안흥량, 강화도의 손돌목과 함께 조선 3대 험한 수로로 일컬었지만 경상도와 전라좌도의 모든 물자가 이곳 수로를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물목이었기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간의 치열한 전투가 빈발했다.

왕건이 진도를 점령한 진짜 이유

후삼국시기 태봉국 민심은 날로 포악해져가는 궁예를 떠나고 있었다. 신하들은 대안으로 왕건을 흠모하게 되고 이 때문에 궁예와 왕건의 관계는 점차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피할 겸 왕건은 909년 6월 수군을 이끌고 자진해 2차 서남해 공략을 감행한다.  왕견은 고이도(압해도)에 이어서 고 진도성을 공격해 점령하는데 이곳은 견훤이 10여년째 다스리고 있었다.

당시 견훤의 해상근거지였던 진도현은 현재의 고군면 일대에 있었던 작은 현(진도군 3현 중 하나)으로 외이리(고성)가 치소였다. 왕건은 당시 진도현을 점령하기 위해 울돌목을 통과한 후 곧바로 우회전하여 갯고랑(현 둔전 간척지)을 타고 남진해 고성과 가장 가까운 뱃길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용장성 서문이 포구 위에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왕건에 의해 점령된 진도는 이후 무안에서 나주의 속현으로 재편된다.

삼별초·여몽의 전방기지 삼지원

황산 삼지원과 진도 벽파진은 고려시기에 진도의 관문이었는데 두 포구를 배경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정부는 40여년 간 강화도로 천도해 몽골에 대항하지만 결국 원종은 문신들과 함께 1270년 5월 23일 개경으로 환도한다. 이때 최씨무신 정권의 특별 군대였던 삼별초는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자 고려정부는 삼별초를 혁파하고 그 명단을 몽골에 넘기게 되고 이에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봉기를 일으킨다. 6월 1일 강화도를 점령한 삼별초는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6월 3일 배 1000여척에 처자와 재화를 실고 70여일만인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다. 그리고 용장산성 안에 진도정부를 세운다. 이때 삼별초의 주력항구는 벽파진이었다.

9월 들어 고려정부와 몽골은 김방경과 몽골 아해를 원수로 해 1000여명의 군대를 파견,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하지만 대패하고 나주로 귀환하고 만다.

삼별초는 온(溫) 왕을 몽골과 대등하게 황제로 추대하고 일본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한다. 또 전라도와 제주도(이문경), 남해(유존혁), 완도(송징)에 각각 장군을 파견해 점령하고 인근  30여 섬과 마산, 김해, 부산 등 경상도 일대까지 장악한다. 삼별초의 계속된 승전에 경상도 밀양에서는 수령을 죽이고 진도정부에 호응했고 개경에서도 몽골과 고려 관리를 죽이고 진도 정부에 투항하고자 했다. 심지어 고려 관리들까지 진도 황제를 알현코자했다.

또 삼별초는 명량수로를 점거하고 조공물자 등의 운송을 차단하니 고려정부의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른다.
이쯤 되자 여몽연합군은 진도정부를 공략하기 위해 3개월 동안 장정 징발과 전투함 건조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한 후 김방경과 몽골의 흔도·홍다구를 우두머리로 파견한다. 이로서 삼지원은 여몽연합군의 전초기지가 된다. 고려정부군과 몽골의 연합부대는 나주 반남의 포구를 출발해 영산강 해로를 따라 명량수로 상의 삼지원에 도착한다. 이때 삼지원에는 6000의 증원군과 400척의 전함이 속속 집결하였고 이들 정부 주력군은 좌군·우군·중군의 3군으로 편성돼 있었다.

총공격은 1271년 5월 15일에 이뤄졌다. 김방경과 흔도의 중군은 배에 허병(虛兵)을 채운 후 삼지원을 출발해 용장산성의 주력항구인 벽파진으로 돌진했다.

이에 진도정부는 정예부대를 벽파진에 파견해 맞서지만 패배하고 만다. 연합군의 중군은 공격하는 척만 할 뿐 격렬한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삼별초가 허병인 중군을 막느라 벽파정에서 전력투구하고 있을 쯤 여몽연합군의 홍다구 외 좌군·우군은 삼지원을 출발해 원포와 용장산성 동편인 오산포구로 상륙, 용장산성으로 진입해 일시에 궁성을 점령해 버린다. 이로 인해 벽파진에 포진해 있던 삼별초의 정예부대는 연합군의 협공을 받는 처지가 돼 버려 일거에 무너지고 만다. 이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삼별초는 2패로 나눠 탈출을 시도한다.

남도포로 향하던 배중손은 임해면 굴포에서 죽임을 당하고, 금갑포로 향하던 왕온은 의신면 왕무덤재에서 생포돼 홍다구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삼별초의 김통정 외 70여만 명은 금갑포를 통해 진도 탈출에 성공 제주도에 입거한다. 진도를 점령한 몽골의 홍다구 소속 군졸들은 양곡 4000석과 금은보화 등을 약탈했고 미처 피난하지 못한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삼아 개성으로 압송한다. 

"무식하게 용감하다"라는 의미인 토속어 '다구지다'란 말뜻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몽골 장수 '홍다구'의 행적과 관련지어 보면 딱 들어맞는다.

삼별초 대몽항전을 끝으로 고려의 해양활동은 개방모드에서 폐쇄모드로 전환되었다. 삼별초 진압 70여년 후 고려정부는 해상활동을 금지하는 '해금정책'과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추진한다. 이로 인해 서남해 지역은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지고 결국에는 1555년 해남 남창의 달량진 왜변과 임진란을 겪게 된다.

뒤집어 보는 임란과 명량해전

조선의 선조임금은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수군이 완전 패전하자 "수군을 폐하고 육군과 합세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량수로에서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쳐 한양으로 향하던 왜 수군에게 치명타를 가한다.

명량대첩 이후 우수영을 비롯한 해남의 각처는 왜의 보복공격을 받는다. 난중일기(9.21)에 "우수영성 안팎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고 인적도 없이 참담했으며 해남에는 흉적이 불을 질러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란·정유란 당시 조선 수군은 전라수군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란초기 경상좌수사 박홍은 임란이 발발하자 본영을 버리고 서울로 도망쳤고, 경상 우수사 원균 마저도 초기대응에 실패한다. 초기 대응에서 실패한 원균은 본영을 우후(종3품)에게 맡기고 판옥선 4척으로 곤양포구로 대피한 후 전라수군에 도움을 요청한다.

또 원균은 정유재란 시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배설과 함께 도주, 고성의 추원포로 상륙해 도망가다 살해당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유일하게 12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망쳐 다니다가 복권된 이순신에게 배를 인계한다.

배설은 명량해전이 있기 전인 8월 30일 아프다는 핑계로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건너가 9월 2일 도망치지만 경북 선산 고향에 숨어있다 체포돼 참형을 당하고 만다.

사실상 경상도 각처 해상전투의 승리는 모두가 전라수군들이 일궈낸 쾌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임란초기에 동원된 판옥선 수에서도 잘 나타난다. 전라좌수군의 24척과 이억기 장군의 전라 우수군의 25척에 반해 경상수군 원균이 거느린 판옥선은 4척에 불과했다.

처음 경상도 해상으로 출전을 망설이는 이순신 장군을 설득한 정운(해남 출신)장군과 명량대첩 당시 왜선의 움직임을 낱낱이 보고한 임준영(해남) 첩보원, 명량해전 당시 13척의 판옥선 배후에 포진했던 100여척의 무명의 용사들 외에도 호남의 수많은 의병이 없었다면 왜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승첩지라는 이유만으로 경상도의 각처에서는 대대적인 현창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일제의 수탈기지 입암포와 삼지원

현의 서쪽 50리에 있다는 입암포는 흰옷 입은 거인이 삿갓을 쓰고 있는 형국의 입암산 암석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현 황산면 성산광산의 포구이다.

조선 초부터 삼지원은 진도의 말들이 상륙하는 곳이었던 반면에 제주의 말은 입암포로  상륙했다. 조선초 '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입압포는 제주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다. 단종 2년(1454)에 황원(화원반도)목장이 좁아 여러 포의 선군을 징발해 입암곶에 목장성을 쌓고 말을 방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은 황산면 우항리~송호리~고천암(2.4㎞)에서 그 흔적이 확인된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입암포와 삼지원은 수탈한 광물자원의 선적항이 되었다. 1926년 무렵 황산면 성산광산이 개발되고 이곳에서 채굴된 알루미늄과 내화용재의 원료인 명반석과 납석이 일본으로 실려 갔다.

1933년 12월 15일자 조선중앙 기사에 의하면 "군수품인 광석이 성산광산에서 연 300만톤, 옥매산광산에서 연 1000톤이 생산돼 요코하마로 실려 갔다."고 적고 있다. 입암포 원형 콘크리트 구조물 등은 분말화 된 광물을 일시 저장했던 탱크이다.

1943년 옥매산 광산은 1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제주도 군수공장으로 징발되면서 폐쇄된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제주도에서 고향 해남으로 귀향하던 200여명의 노동자들을 실은 배가 소안도 인근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왕건의 진도 점령과 삼별초가 진도를 항몽 근거지로 삼은 이유는 일본 또는 경상도와의 뱃길의 요충지인 명량수로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명량수로에 전라수영을 설치하고 명량대첩에서 조선을 구한 경우에서도 그 이유는 설명이 된다.

명량수로는 해양을 중시하던 시대에서는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지만 그것을 경시했을 때는 왜구의 침탈 경로와 수탈기지로 전락함을 역사는 말해준다.

일제시대 황산면 성산 입암포구의 광물저장탱크.
일제시대 황산면 성산 입암포구의 광물저장탱크.

고려시대 몽고군에 항거한 삼별초는 명량수로를 점거하고 조정으로 가는 조공물자 등의 운송을 차단한다. (삼별초가 새로운 정부를 세웠던 진도 용장산성 내 궁성 터)
고려시대 몽고군에 항거한 삼별초는 명량수로를 점거하고 조정으로 가는 조공물자 등의 운송을 차단한다. (삼별초가 새로운 정부를 세웠던 진도 용장산성 내 궁성 터)
황산 옥매산 정상에서 바라본 명량수로,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일본·한국·중국을 잇는 해로로써 그 의미가 더 커지고 있다.
황산 옥매산 정상에서 바라본 명량수로,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일본·한국·중국을 잇는 해로로써 그 의미가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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