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해남의 옛포구 이야기
맹진포 출신 이의신 '천도설'로 조정이 발칵 뒤집히다8. 죽성포 사람들은 미륵을 왜 기다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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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1.18  15: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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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맹진마을에 있었던 맹진포는 계곡 성진의 별진포와 옥천면의 해상관문으로 뱃길의 요충지였다.(흑석산에서 바라본 맹진포구의 물길)  
 
마포(馬浦)라는 생소한 이름은 마산면의 옛 지명이다.
1914년 산일면(학의리의 서쪽 15개 마을) 일부와 통합돼 마산면이 된 것이다. '마포면'은 지명에서 보듯 그 중심지는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큰 물길인 계곡천에는 별진포와 둔주포가, 옥천천 상류에는 백제시기의 옛 무덤과 진터산성 관련 거점포구가 있었을 것이다. 두 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맹진포, 그 하단에 근대시기의 북창이 있었다.

   
 
  마산 맹진마을과 주변 전경.  
 
또 하나의 물길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장촌과 화내리를 관통하는 산막천인데 그 끝에 근대시기 공세포가 있었다.

마산 장촌 일대에 옛 읍치가 있었고 이로 인해 해남의 원님이 아침마다 마산에 있는 어르신께 문안인사를 드리려 다녔다는 아침재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 원님은 단종 때 산막리에 기거했던 부사 이영화나 장촌리 518번지에 살았던 조선13대 명종 때의 대학자 석천 임억령 선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촌리를 통과하는 산막천에 대해 호남읍지(1872)에서는 조선시기에 '석천(石川)'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따 임억령 선생은 자신의 호를 석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장촌리는 '장자촌' '장재'라고도 불렀는데 모두 '부자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나 부자가 누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옛 마포면의 마포는 맹진포

옛 마포면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당연히 현 면소재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여지도서(1757)에는 '해남관아문(門)에서 20리'라 기록하고 있어 '10리' 거리인 현재 면소재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일까?
마포(馬浦)라는 이름은 큰(馬=크다) 포구라는 뜻이다.

'맹진'은 맏나루 말나루로 맹(孟=맏맹=크다)과 상통한 의미이다. '맹진포'라고도 했는데 화내리를 거쳐 가면 20리길로 맹진이 마포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옥천천도 조선시기에는 '맹진천'이라 했으며 호남읍지(1872)에 '상선이 머무르는데 학관이 세를 받는다'고 적고 있다. 맹진마을의 정자 인근에 길쭉한 장대석들이 십수개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을 주민들께 물어보니 현 맹진다리 냇가에서 포크레인 공사 중 나온 것들이라 하는데 농노두 즉 징검다리라 했다. 그런데 석재들을 자세히 보니 징검다리용이 아닌 석교(돌다리)의 일부로 추정된다.

석교는 여지도서(1757)와 대동지지(1865)에 '25리에 맹진교가 있으며 밀물 시 바닷물이 부딪쳐 부서진다'는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옛 세곡창이었던 죽성포는 맹진포

죽성포는 동국여지승람(1481) 이후 조선후기 호남읍지(1872)까지 각종 지리지에 등장한다.
현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포 위에 토성(土城)이 있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세금(田稅)를 거둬들인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고려 초기 12대 조창 중의 하나였던 영암의 장흥창으로 추정하고 있다.

   
 
  맹진 정자 위 밭은 옛 조세창고 터였다.  
 
당시 조창지에는 판관(조창 책임자)과 수백 내지 천여명의 창졸(倉卒)군사가 파견되고 시장이 형성되어 북적거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죽성포는 어디일까?

성(城)이라는 조건만 보면 마산 장촌리의 죽산성으로도 볼 수 있지만 석성(石城) 거리(郡 10리)가 어긋나기 때문에 맹진리(郡 20~30리)로 추정된다.
거리상으로 30리와 일치하고 마을 동쪽에 성죽골이 있어 그 위의 산이 당시 죽성산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맹진(포)마을 위에 조그만 토성이 있어 기록과도 일치한다. 결론으로 마포와 맹진포 그리고 죽성포는 동일 포구명으로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런 맹진포구는 큰 나루이면서도 계곡면 성진의 별진포와 옥천면의 해상관문으로 뱃길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맹진마을의 정자목은 아름드리 거목으로 오랜 역사를 알려준다. 맹진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정자의 동쪽 구릉아래가 맹진포구(죽성포 해발1.3m)였으며, 전세를 받은 세곡창은 청자 편들이 발견되는 정자 위 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목이나 청자 편들은 조선 초기나 고려시기의 흔적으로 해석된다.
 
맹진리 매향바위는 보물지도

맹진리의 서쪽 만대산 북서쪽 6부 능선(맹진리 산 96)에 있는 높이 8m정도의 속칭 '장군바위'는 그 틈 사이에 음각 글씨가 새겨져 있는 '매향바위'이다.

   
 
  한때 보물이 있는 곳이 기록됐다고 알려진 매향바위.(마산면 맹진마을)  
 
민중들이 난세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의례를 행하고 그 결과를 기록한 일종의 '매향비'이다. 매향비는 전국에서 영암 2곳, 장흥 덕암, 신안 암태, 영광 고법성, 충청 예산 등에서 십수개가 발견되었다.

당시 묻은 향나무는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어 스스로 물위로 떠오르게 된다는 믿음은 미륵신앙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강철과 같이 단단한 '침향목'은 불상 약재 등으로 이용되는데 그 값어치는 황금과 같은 무게로 친다한다.
매향비를 묻은 장소는 보통 어느 방향으로 몇 걸음 등으로 기록하고 있어 보물지도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침향목은 갯뻘 속에서 진공상태로 보관되기 때문에 썩지 않는다. 일본에서 발굴한 예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없다. 아쉽게도 매향비들은 30여년 전부터 확인되기 시작했는데 제자리에서 발견된 경우가 거의 없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발견되곤 했다.

움직임이 없는 맹진리의 장군바위에 기록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죽산현의 동쪽 패포(貝浦)에 미타향도 58명과 상당마을 주민 1000여명이 모여 매향을 행하였다.

영락 4년(태종6년 1406)에 비를 새기고 매향의식은 법각(法覺)의 주관 하에 혜관(惠觀) 등이 참여하였다.' 침향은 방향만 기록하고 몇 걸음인지 알 수 없다.

보물(침향목)을 영구히 보관하고자 하는 해남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전국의 매향의례는 1309~1427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특별의례를 왜 이때 행해야 했을까? 

 미륵불을 염원한 맹진사람들

려말선초(1300~1450)에는 왜구들의 침략이 잦았다. 왜구들은 서남해안에 침범해 조창지의 세곡과 조운선을 탈취하고 인마살상 등을 일삼았다.
따라서 서남해 민초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고려말(90년) 왜구의 침략건만 해도 500여건인데 이중 전남은 31차례의 습격을 받았다.   
공민왕 8년(1359) 2월 해남도 습격을 받았고, 거제도, 진도, 남해, 흑산(영산)의 크고 작은 섬들도 왜구들의 소굴이 되었다. 특히 진도 조도에서는 왜구들이 보리농사를 지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생생히 전한다.

이 같은 왜구의 출몰은 당시 정부의 '공도 정책' 즉 섬 지방이나 해안 50리 백성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거시키는 수세적인 정책의 결과였다. 고려 말 진도민은 영암 시종으로, 흑산도(옛 지명은 영산도)민들은 나주 영산포(옛 지명 남포)로 이주시켰다.

영암 시종으로 이주했던 진도 사람들은 다시 해남 삼산면 지역으로 옮겨온다. 1409년 진도민들이 삼산면으로 옮겨오자 해남은 해진(해남·진도)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2년 후에 해남의 치소를 현산면 고현에서 내륙인 삼산 계동으로 이전한다.

이때 삼산면 계동 토성과 현산면 금쇄동에 구산성(狗山城)을 축성한다.
맹진리(죽성포) 경우도 세곡을 거둬들이는 조창이 있어 영광 법성포창 습격(1305 )이나 금강변의 진성창 습격(1380)과 같이 왜구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왜구의 침입을 받은 영광 고법성포창 민중들은 두 차례(1371,1410)나 매향의례를 올린다.
맹진 조창지 사람들도 극도의 불안 속에 1406년 매향의례를 행함으로써 미래불인 미륵이 세상이 빨리 내려와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을 간절히 염원했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풍수가 이의신

조선시대 최고의 풍수지리가로 알려진 이의신은 맹진출신이다. 풍수지리에 워낙 뛰어나다 보니 맹진에는 그에 관한 설화가 많이 전한다.

   
 
  이의신이 다녔던 서당길.  
 
이의신이 어렸을 때 맹진마을에 있는 서당엘 다닌 적이 있다.
이때 어여쁜 처녀(백년여우)가 밤마다 나타나 소년 이의신을 유혹하며 자신의 입속에 들어있는 구슬(여우주)을 이의신의 입속에 넣어 주곤 했다.

날로 여위어가는 의신을 보면서 서당 훈장은 그 처녀는 백년묵은 여우가 분명하니 구슬을 입에 넣어주거든 꼭 물고 서당으로 도망쳐 오라 했다.

다음날 스승의 말대로 구슬을 물고 서당으로 도망쳐 오던 의신은 그만 넘어지면서 구슬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를 본 훈장은 하늘을 보고 구슬을 삼켰으면 하늘의 섭리와 땅의 이치를 아는 당대 최고의 인물이 되었을 텐데 땅을 보고 구슬을 삼켜 지관으로 머물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설화는 이의신이 자신의 무덤으로 잡아놓았던 터를 윤선도가 꾀를 내 빼앗았다는 이야기다. 그 터가 바로 금쇄동의 고산 무덤인데 이 터로 인해 해남윤씨가가 지금까지 번창 하고 있다고 한다.

서자로 태어난 의신은 자신의 큰 뜻을 펴지 못하자 중국(明)으로 건너갔다고 하며 의신이 거처 간 인연으로 중국 남쪽섬에는 '해남'이라는 이름이 전한다고 한다.  

 이의신의 천도설에 조정이 발칵

이의신은 조선왕조실록(1600~1630 기록)에 300여 차례나 이름이 거론된 실존인물이었다.   
서자출신이지만 무학대사 이후 당대 최고의 지관(풍수)이었던 의신은 선조 때부터 왕족릉 터를 잡는데 핵심역할을 했고, 그와 같은 역할로 선조는 이의신에게 동반직(문과)벼슬을 내려 자신의 옆에 붙잡아 두었다.

   
 
  맹진마을과 맹진포구 터 전경.  
 
1612년 광해군 때 이의신은 경기도 파주로 서울을 옮길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린다. 천도의 이유에 대해 의신은 임진왜란과 역적의 변이 잇달아 일어났고 조정 신하들이 파가 나누어 진 점, 사방의 산이 벌거숭이가 된 것은 모두 한양의 땅 기운이 쇠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조정은 발칵 뒤집혀져 의신을 형벌에 처할 것을 청한다. 광해군은 이의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경기도 파주 교하현으로 천도하려고 갈망하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1630년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의신은 인척인 윤선도(1587~1671)와 만나게 되고 고산의 풍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해남군지(1925)의 명기(名基)편에 보면 '맹진리는 북쪽 20리에 있는데 주부 이의신이 태어난 곳'이라고 적고 있다.

맹진포구 위의 맹진토성은 둥그런 테를 둘러 봉우리가 불룩한 테뫼봉으로 여우처녀의 통통한 젖가슴이나 왕 무덤을 연상케 한다.
당대최고의 지관이었던 이의신과 관련해 상상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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