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도 탐낸 화원가마터 한국청자의 원류였다

화원면에서 최초 생산된 청자는 이후 산이면 지역으로 그 터를 옮긴다. 그리고 12세기 강진군으로 건너가 가장 아름다운 청자문화를 꽃피운다. (2003년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된 산이청자 파편들)
화원면에서 최초 생산된 청자는 이후 산이면 지역으로 그 터를 옮긴다. 그리고 12세기 강진군으로 건너가 가장 아름다운 청자문화를 꽃피운다. (2003년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된 산이청자 파편들)
한반도의 서남단에 있는 화원반도는 L자 모양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모서리로 그 뱃길은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다.
동진하면 일본, 남서진하면 중국 상해, 북진하면 한양과 중국 북부 그리고 화원땅끝을 돌아 내륙으로 진입하면 영산강을 따라 영암과 나주에 이르기 때문이다.
화원반도에서는 원삼국시기의 패총 및 4C 대형옹관과 삼국시대의 대형고분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해남반도와 차별화가 뚜렷하다.
화원반도의 옛 이름은 황원곶이며 백제시기에는 황술현(읍치:문내 고당)이었으나 통일신라에 와서는 황원현이라 하여 완도지역과 함께 양무군(강진)에 속했다. 그리고 고려 때에는 영암의 임내로 재편되었다가 조선 1488년 무렵에야 해남 땅으로 이속됐다.
고려시대 때 화원반도 역사를 알려면, 영암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고려시기 화원반도에 관한 기록은 지리지의 '황술 또는 황원'의 언급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반해 고고학적 유물은 많이 산재돼 있다.

세계 2번째 청자생산 화원가마터

97년 장마철, 화원 바닷가 산골인 뱀골마을 이곳저곳에서 가마터가 쏟아졌다. 청자도 아니고 백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83년 무렵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산이면 진산리의 청자와 닮은 것도 같았지만 그것과도 분명 달랐다. 녹색빛에 가까워 필자는 '녹자'라 했지만 공식 명칭은 '초기청자'라 하는 것이었다.
녹색빛의 청자와 함께 검은 빛의 '흑자'도 발견되었고 간혹 토기도 보였다. 필자가 5년 동안 20여 골짜기를 이 잡듯 뒤져 찾아낸  가마터는 총 60여기로 규모면에서 전국유일한 곳이었다.
남부지역의 장흥·고흥·강진과 중부지역의 시흥, 개성 인근 등은 고작 1~3기뿐인 것에 비해 엄청난 규모여서 한국도자학계를 놀라게 했다. 중부권 가마터에서는 청자와 백자가 함께 출토된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청자와 흑자가 함께 발굴되었고 중부권의 벽돌 가마와 달리 이곳은 흙가마였다.

화원 초기청자 원류 중국 월주청자

화원의 초기청자의 특징은 대부분 식기류와 병 항아리 등으로 모두가 문양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중 찻잔은 모두 '해무리굽'이라고 하는 특이한 굽 모양을 하고 있다. 굽 바깥지름이 6㎝내외이고 굽 높이가 2~3㎜ 정도로 매우 낮으며, 굽 두께는 15㎜내외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같은 도자기를 장신구 옥벽을 닮았다하여 '옥벽저(玉璧底)'라고 하며 8~9C 중반까지 중국 월주를 중심으로 생산되다 단종 된다. 그런데 화원가마터에서 그 유사품이 발견돼 주목된다.
청자의 제작기술은 우리의 전통기술이 아닌 분명 중국에서 들어온 신기술이었던 것으로 보아 중국청자의 발상지인 상해 아래 절강성 동부지역의 월주청자의 기술이 수입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인다.
한국청자의 집단발상지는 화원인 것은 분명하며 따라서 화원은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자를 생산한 곳이다. 이곳 가마터의 운영 시기는  10C기 전후 일 것으로 추정된다.

흑자는 영암 구림도기의 전통기술

화원의 초기청자 가마터에서는 흑자(갈색 또는 검은색)가 생산되었는데 주로 병과 항아리 같은 저장용 큰 그릇이다. 이러한 병들의 몸통을 보면 옆을 두들겨 편평하게 만들었기에 '편병'이라한다.
이러한 기법은 배 수송 시 공간을 줄여 다량을 선적하기 위함이다. 이런 편병은 통일신라 시기의 영암 구림도기 가마터의 전통 양식이기도하다. 영암 구림의 흙가마와 주판알 모양의 기름병 등도 중국월주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기술이다. 

KBS진풍명품 최고가 12억 산이청자

수년전 황토그림 기법의 장고(長鼓)가 KBS 진품명품에서 최고가인 12억으로 평가됐다. 장고 모양의 이 도자기는 산이 가마터의 특산품이다. 산이면 진산·초송리 해안 6㎞에 걸친 가마터는 그 규모로 보아 당시 최첨단 공단지역이었다.
이중 남쪽의 초송리 가마터의 연대가 가장 빠르고 북쪽 진산리 가마터로 가면서 시기가 늦어진다. 산이 가마터는 3차례 정도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장 빠른 연대인 초송리 청자는 화원지역 가마터의 끝 시기의 생산기법과 일치하고 있다.
산이면에서 발굴된 도자기의 해무리굽의 지름은 화원의 6㎝대에서 4~5㎝로 줄어들고 다양한 문양도 등장한다. 특히 산이지역 도자기는 황토그림과 음각 매병 및 악기인 장고가 대량 생산된 점이 특징이다.
산이면 가마터의 생산품은 해상의 뱃길을 따라 전국으로 공급되었다. 그 중 1983년 완도 어두리 앞바다와 2003년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산이면에서 생산된 도자기 3만~수천점이 인양돼 그 생산량이 대규모였던 것을 증명했다. 간척공사와 개간으로 대부분의 가마터는 파괴돼 버린 이곳 가마터의 운영 시기는 11C 전후로 추정된다.

문화고속도로 바닷길과 해남청자 

한반도의 서남단 화원반도의 가마터를 이해하려면 바다중심의 사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중국의 상해 남쪽과 연결된 남방항로에 그 해답이 있다.
절강성 월주지역 동쪽은 신안군과 같이 섬이 많은 주산군도이다.  동쪽 보타도라는 섬에는 '신라초'라는 암초가 있다. 신라상인이 불상을 싣고 신라로 가려다가 배가 암초돼 그 불상들은 보타도에 모셔지게 되고 그곳을 '불긍거관음원'이라 했다. 이 보타도는 바로 절강성 영파(중국 3대 옛 무역항)에서 출항한 배들의 중간기착지인 것이다.
견훤은 강남의 오월국과 7차례 교류하였고, 고려 1123년 서긍(徐兢)도 중국 영파~흑산도~서남해 항로로 왕래하였는데 이를 '남방항로'라 한다. 1742~1883년 사이에 중국 강남상인들이 흑산도 인근으로 표류한 사실이 '비변사등록' 기록에도 24차례나 등장한다.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는 '신라시절 영암고을의 해상에서 당(唐)으로 떠나는 장삿배들이 꼬리를 물었는데 이 배편을 이용해 최승우 최치원 김가기 등이 당으로 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중 최치원 설화는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화원 서동사의 창건설화와 비금도·우이도 설화가 그것이다. 남방항로와 연관된 설화인 셈이다.
옛 서동사 근방의 가마터 2곳은 절에서 운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며 서쪽 땅끝 양화리 안쪽에 있는 '당포(唐浦)' 마을은 '당나라로 가는 포구'라는 뜻으로 간척 이전에 바람을 기다리는 옛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비취옥빛 찻잔과 녹차

9C 장보고가 활약할 무렵 수많은 신라의 선승들은 배편을 이용해 중국의 남종선을 배우러 중국 강남을 왕래했다.
그 결과 신라하대의 선종 9산 선문 중 장흥보림사(가지산문), 곡성태안사(동리산문), 화순쌍봉사(사자산문의 모태)가 탄생한다. 그 중 현욱(837년) 이엄(896년) 경보(908년) 등의 스님은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 회진항을 이용한 고승들이다.
당시 영암은 도선·경보 등 걸출한 선승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828년 김대렴이 녹차를 수입해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녹차의 전파는 자연스럽게 찻잔의 수요를 급증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활동시기(청해진 828~841)에 중요한 무역품이었던 옥벽저 찻잔은 완도의 장군섬, 경주안압지 등서 발견되었고 안압지에서는 화원·산이 청자와 흡사한 백여편의 도자기가 출토됐다.
장보고의 중국 월주청자 수입과 녹차의 재배, 선승들의 차 마시는 풍속은 국산 찻잔의 생산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월주청자 찻잔은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될 정도로 고가였다 한다. 그런데 왜 화원청자는 녹색 빛이었을까. 중국청자의 발생은 2천여년 전 금보다 옥이 귀했을 당시 인공 비취옥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푸른색보다는 옥색에 가까운 녹색 빛을 최고로 쳤다. 화원청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귀한 찻잔만큼은 특별하게 구워졌다. 접시나 종지기는 보통 10여개씩 차곡차곡 포개어 구웠으나 찻잔은 '갑발'이라고 하는 통속에 넣고 한개씩 구워 색깔이 곱고 잡티 없이 만들어냈다. 화원 가마터는 귀중품인 해무리굽의 찻잔을 생산하기 위한 공단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황원청자 운영자는 장보고였을까

해상의 뱃길을 배경으로 화원의 가마터는 형성되었다. 60여곳의 집단 가마터를 운영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당시는 흙과 화목을 마련하는 일은 고된 노동에 속했다. 가마 한 기당 인부 20명만 잡아도 천명을 훌쩍 넘는다. 인부 가족과 관리인까지 합한다면 수천이 넘는다.
또 대량으로 생산된 청자를 전국으로 공급하려면 배와 유통망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시스템은 지방의 강력한 해상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화원면의 가마터 주인은 장보고 대사일 가능성이 한때 제기되었다.
그러나 청해진 일부로 추정되는 완도 장군섬에서 같은 종류의 도자기가 발견된 예가 없어 더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화원 가마터가 청자 찻잔의 국산화를 촉진시킨 것만큼은 분명하다.
10C 초반 왕건의 서남해 진출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왕건은 903년 3월 이후 수군을 이끌고 수차례 남하해 견훤과의 해상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주 이남과 진도를 차지하게 된다.
왕건의 서남해 진출의 첫째 목적은 바로 화원가마터에 있었다. 당시 국내최대의 최첨단 공단은 곧 자금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견훤의 가마터를 수중에 넣는 일은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금호도의 금성산성은 가마터의 보호를 위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정국이 안정되자 행정구역을 재편한다. 이때 영암 인근의 현들은 영암의 속현으로 강등시키지만 가마터가 있는 황원현 만은 황원군으로 승격을 시킨다.
이외에도 왕건은 태어나기 전부터 영암출신 도선국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영암 무위사의 형미스님과의 인연 그리고 책사로 영암 최지몽(907~987년)을 등용한다.
최지몽은 왕건을 따라 중앙에 진출해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까지 6왕에 걸쳐 63년간 핵심권력에 있었다.
아무튼 이들은 화원과 산이 가마터가 운영되던 시기의 영암의 걸출한 인물들인데 최지몽을 끝으로 영암출신 인물이 고려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 영암군의 위세 및 서남해안의 집단가마터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화원과 산이 가마터의 거점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라믹 산단은 중국의 강남과 연결된 해로를 따라 형성되었고 강력한 지방의 해상세력에 의해 운영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청자는 화원면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보인다. (화원 초기청자 파편들)
우리나라 청자는 화원면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보인다. (화원 초기청자 파편들)

KBS 진품명품에서 12억원으로 평가된 산이출토 장고모양 도자기.
KBS 진품명품에서 12억원으로 평가된 산이출토 장고모양 도자기.
화원초기청자이후 청자생산지는 산이면으로 이동한다. 산이청자 가마터가 운영되던 시기는 11세기 전후이다.(2003년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될 당시의 산이청자 모습)
화원초기청자이후 청자생산지는 산이면으로 이동한다. 산이청자 가마터가 운영되던 시기는 11세기 전후이다.(2003년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될 당시의 산이청자 모습)
화원 신덕저수지 주변에는 초기청자 가마터가 많이 분포돼 있다.
화원 신덕저수지 주변에는 초기청자 가마터가 많이 분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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