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남주(초등학교 교사)

북일 방산리에 자리한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대 무덤 양식이다. 이 무덤 양식을 통해 북일지역이 한때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군의 후방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일 방산리에 자리한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대 무덤 양식이다. 이 무덤 양식을 통해 북일지역이 한때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군의 후방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반도를 두 쪽으로 가르는 두륜산맥의 동쪽은 서쪽에 있는 옛 해남과는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고 있다. 이곳은 두륜산맥이 상호왕래를 막아 이질적인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강진만 입구의 서남쪽에 위치한 북일지역은 간척으로 인해 육지화 되었지만 신방리 고분군 인근까지도 한때 바닷가였다. 북일 내동간척지 남쪽의 밭섬에도 고분 두기가 있는데 고분의 위치상으로 보아 이들은 육상세력이 아닌 해상세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현존하는 북일지역의 유적은 성마산 석성과 독수리봉·거칠마 토성 등 산성 3곳과 고대 시대의 대형무덤들 십수기이다.

삼산면 용두리에 있는 42m정도의 말무덤과 현산면 조산리 있는 백제시대 고분을 제외하면 해남의 대형 고분들은 모두 북일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대형무덤과 산성으로 보아 북일지역에는 상당한 무장세력이 오랫동안 웅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실체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북일지역의 대표적인 무덤은 방산리에 있는 장고분으로 악기인 장고(장구)의 외형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덤 앞의 모양은 방형(네모꼴)이고 뒷쪽 모양은 원형으로 매우 독특한 형태이다.

원형부 중간땅속에 매장시설인 돌방이 있고 무덤 앞쪽의 방형부는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추정된다. 전체크기는 76m, 높이는 10m정도로 국내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일본 양식의 전방후원분과 닮았다하여 전방후원형 고분이라 한다.

1984년 이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한일고대 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는 일본 사학계의 주장인 임나일본부의 증거라는 것이다. 이에 강인구 박사(정신문화원)는 무덤의 외형을 세부 측량한 결과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류가 한국에 있다고 강력 주장해 일본 고대사학계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후 80년대 후반 영산강유역에서 십수기의 동일한 스타일의 무덤들이 속속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영암·영광·고창에 각 1기, 함평·담양에 2기, 광주 3기 등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다. 아무튼 북일의 장고분 발견은 삼산면 용두리 것과 함께 한일고대사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외에도 북일지역에는 20여미터 내외인 원형·네모꼴 무덤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데  이중 무덤의 표면을 돌로 덮은 '즙석분'이 북일 신방리에서 발견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석촌동의 고분을 제외하고는 함평1기와 화순 등 남부지역에서 드물게 발견되었는데 이 즙석분은 일본에 많다.

우리나라의 대형고분은 4세기 무렵부터 법령이 정비되기 전까지 지배자가 자신의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었다. 따라서 당시 세력의 크기를 무덤의 크기로 가늠하기도 한다. 왜냐면 대형무덤축조에 필요한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사결과 북일 무덤군들의 조성시기는 5~6C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를 백제로 보고 있지만 백제시기 읍치가 있었던 현산 고현과 북일과는 별개의 지역이고, 고고 출토물도 백제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백제와의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북일지역에 대형 고분군이 들어서기 이전인 4세기 무렵 해남의 중추세력은 해남읍 옥녀봉 산성을 중심으로 한 해창만의 옹관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산면 신금·농암, 화산면 부길리의 대형옹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큰칼, 철덩이, 창끝과 토기 등이다. 말과 관련된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 무덤의 주인은 토착세력의 수장급이며 칼과 창의 출토는 당시 무기를 위세 품으로 여긴 무인(武人)임을 알 수 있다.

해창만에서 보이는 외부 세력의 흔적은 삼산면 용두리의 전방후원형 고분이다.
4C 해창만 옹관세력과 전방후원분 세력간의 충돌이 있었고 길지 않은 기간(수십년)이 지나자 이 세력의 중심지가 북일 지역으로 이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일지역 고분들은 해창만과는 달리 토착세력과의 충돌을 살필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두륜산을 등지고 있어 북서풍을 막기에 유리하고 바다와의 접근이 용이한 곳에 위치한 이곳 세력은 백제 세력과는 무관한 해상세력이라는 점이다.

고대문화의 흐름으로 한국이 전방후원형 무덤의 원조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시기와 분포규모로 보아 일본이 원류임이 분명하다.

일본에는 현재 수천기의 전방후원분이 남아 있으며 최대는 오사카에 있는 인덕천황릉으로 486m이다.
북일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 등은 한동안 학계에서 쉬쉬하다가 2000년대 들어 함평의 신덕고분, 광주의 월계동·명화동 고분을 발굴하고 나섰다.

또 북일 장고분은 도굴로 인한 확인 결과 출토된 고고유물들이 일본의 그것들과 매우 유사함이 밝혀졌다. 함평의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대도와 마구들, 원통형 토기들도 마찬가지다.

원통형 토기 등장은 '일본서기(720년)'에 의하면 수십명을 함께 순장하였는데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천황이 사람으로써는 할 일이 아니라며 대안으로 원통형토기를 만들어 고분주위를 빙 둘러 장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북일 장고분에서도 무덤주위에서 원통형 토기가 발견되었고, 매장시설인 석실에 들어가 본 결과 석벽의 내부가 일본에서와 같이 붉은 칠과 철갑옷편이 발견됐다. 

장고분은 한국의 전방후원형 고분 중 가장 큰 것으로 확인됐다.
4C가 되면 고구려 백제 신라 마한 가야 왜의 대외관계는 매우 긴박하게 진행이 된다. 그 원인은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위기를 느낀 백제는 왜·가야와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한다. 본격적인 대립은 광개토대왕 (재위 391∼413)때 시작되었다.

397년 백제는 태자 전지를 왜에 볼모로 보낸 대신 왜의 군사 지원을 받아 400년에 고구려 5만병과의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404년에는 대방(황해도)지역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지만 모두 참패하고 만다.

이 무렵 영산강유역에 있었던 침미다례(중국호칭:신미제국) 등도 백제·왜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음을 '일본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신공왕후 49년 (369년)기록에 '황전별·녹아별과 사사노위 목라근자(백제장군)와 함께 군사를 보내 신라를 격파한 후 이어서 가야 7국도 평정하고 군사를 서쪽으로 돌아 고계진에 이어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과 왕자(근구수왕)가 왔다. 반남(나주)등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때 백제 근초고왕은 유명한 '칠지도'를 만들어 372년 왜에 보낸다.

또 신공 50년(370년)에 천태장언·구저(백제인) 등이 백제에서 돌아 왔을 때, '바다의 서쪽 제한(諸韓)을 그대의 나라에 주었다.'

이외에도 응신천황 8년(397년) 3월, 백제왕자 전지가 볼모로 왔을 때 백제인이 말하기를 '아화왕(백제)이 무례하여 침미다례 등을 왜에 뺐겼다. 이 때문에 왕자 전지를 보낸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해남을 포함한 침미다례를 왜가 점령하고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재위 413~491)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강화한다.
이에 신라도 위협을 느끼고 급기야 백제와 동맹관계를 형성한다.

이 당시 왜도 외교관계를 활발히 전개한다. 왜는 중국(동진·송·제·양)에 12차례나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받치고 책봉을 요구하는 등 당시 주변정세가 매우 긴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 '송서(宋書 487~488년 편찬)' 기록에 의하면 왜는 451년 송(宋)에 조공하고 책봉을 요구하였는데 그 관할 국가가 왜와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마한), 백제 등 7국이었다.

이에 송(宋)은 백제를 제외한 '6국을 제군사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한다.
왜가 요청한 내용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당시의 복잡한 국제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임에는 분명하다.

또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에는 "마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가 한계이고 남으로는 왜와 접해(南與倭接) 있다." 는 기록의 근거로 '왜(倭)'가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영산강일대 전방후원형 고분이 분포한 곳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이 된다. 하지만 언급된 사서의 편찬연대가 3C 후반이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당시 백제와 왜간의 밀착된 교류이다. 그 일례로 5~6C 백제의 왕 중 전지왕(재위 405~419)과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은 왜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왕들이다.

무령왕의 경우 원래 이름은 '사마'인데 현 일본말 '시마'의 고어로 우리말 '섬(島)'이다.
무령왕의 아버지 개로왕은 왜와의 동맹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동생 곤지를 왜로 보내야만 했다. 이때 왜국에 가기 싫은 곤지는 분만 직전인 형수를 아내로 주면 가겠다고 생떼를 썼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개로왕은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곤지는 형수와 함께 배에 올랐다. 그리고 형수는 항해 중 큐슈의 '각라도'라는 작은 섬에서 아기를 낳았다.

따라서 이름을 '사마'라 부르게 되었고 왜국에서 성장한 후 백제로 돌아와 무령왕이 되었다.
또 왜는 660년 무너진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부여풍 백제왕자와 함께 배 천여척에 2만7천 군사를 백제로 보내 663년 백촌강 전투를 벌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백제와 왜의 관계는 선진문화를 건네고 군사적 도움을 받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일본 천황가의 뿌리까지도 백제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활발한 교류는 뱃길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뱃길에서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바로 해남의 북일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북일지역의 고분군들은 대고구려 전쟁 시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왜 병력들의 후방전초기지 중의 한곳이었음 추정해 본다.  

북일 전방후원분 전경.
북일 전방후원분 전경.

일본 전방후원분 모습.
일본 전방후원분 모습.
북일 전방후원분 내부 석실의 석벽이 일본에서와 같이 붉은 칠이 돼 있고 일본식 철갑옷편이 이곳에서 발견됐다.
북일 전방후원분 내부 석실의 석벽이 일본에서와 같이 붉은 칠이 돼 있고 일본식 철갑옷편이 이곳에서 발견됐다.
일본식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의 조성과정 추정 모습.
일본식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의 조성과정 추정 모습.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