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C 해창만 세력과 일본간 전쟁이 있었다

해창만을 끼고 있는 삼산면 옹관세력들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삼산 신금마을 발굴 조사결과 해남의 옹관묘 세력과 일본세력과의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대형 옹관묘)
해창만을 끼고 있는 삼산면 옹관세력들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삼산 신금마을 발굴 조사결과 해남의 옹관묘 세력과 일본세력과의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대형 옹관묘)
해창만은 1988년 완공된 고천암 간척지 동쪽의 해남읍과 삼산면, 화산면 일부의 옛 바다를 일컫는다.
중심 물길인 어성천은 고대~근세까지 해남 고대 토착민과 고대 일본인, 진도민의 생명을 연결해준 생명의 물길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 해진군과 녹산현, 사라향의 치소가 형성되었고, 4C전후에는 옹관토착세력의 중심지와 일본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다.

역사기록에는 삼산천 물길의 옛 포구들로 어성포와 해창, 어란포, 삼촌포가 보이며 인근에는 고려시기의 백야포(읍 백야리, 염창(鹽倉)이 있었음)를 비롯해 우음도포(읍 부호리), 종천포(읍 남천리 학관이 세를 받음)가 보인다.

이외에 해남읍 배드리에도 배가 들어왔다는데 옛 지도에 의하면 '주교(舟橋)' 즉 배다리로 물위에 배를 띄우고 나무를 걸쳐 만든 다리가 배드리로 와전된 듯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기록은 어성포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해남현 남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해창바다의 갯고랑과 삼산천이 만나는 곳에 어성포는 있었다.

옛적에는 농암마을의 옹기배, 각양각색의 고깃배들이 들어와 해남읍과 인근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고기가 풍성하다는 뜻으로 어성포(漁成浦)라 했다.

봄이면 추자도 멸치 배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추자도에서 귀한 볏짚과 멸치를 바꾸어 갔다고 한다.
해남 해창(海倉)은 '여지도서 1757년'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후기에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한양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던 곳이다.

강가에 있으면 강창, 해창은 바닷가에 있는 세곡창을 말하며 해안 각 고을에 1처씩 있었다.
해남은 현 화산면 해창마을에 있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전세(토지세 378석)나 대동미(2464석) 등을 2월에 거둬들여 3월에 배에 실고 안흥량~통진~강화를 거쳐 한양까지 운반하였는데 그 일정은 17일간이었다 한다.

이런 해창은 일제시기까지만 하여도 여수와 부산가는 동력선과 제주 다니는 배를 타는 곳이기도 했다.
해창마을은 백 수십호가 되는 큰 마을이었다. 세곡의 운송은 국가의 존립과 관계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해창은 세곡 수납과 조운선단을 지키기 위한 관리와 병졸이 파견되고 그리고 인부와 세곡상인들이 붐비어 한시적으로 장시가 형성됐다.

또한 상시 고깃배는 물론이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려말선초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섬지역과 해안가 50리를 비우는 이른바 공도정책이 실시됐다.
때문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 사람들을 영암의 시종면 월악리와 태간리 지역으로 강제이주 시킨다.

그러나 고향과 멀다는 이유로 조선 태종9년(1409) 2월에 현 해남 삼산면의 서쪽(삼촌면)으로 다시 이거되었는데 당시 관문은 삼촌포였다.

이때 해진군 읍치도 현산 고현에서 삼산 계동으로 옮겼는데 이는 해안의 읍치를 보다 내륙으로 옮기는 전국적인 조치이다. 진도인들의 강제이주는 목장과 관련해 한번 더 있었다.

태종14년(1414) 1월에 제주도 안무사 윤임에게 명해 제주말 1800필을 진도로 옮기게 했다.
15차례에 걸친 말 운송이 끝나자 같은 해 3월 해진군수 이각에게 명해 진도민을 데리고 진도(현 고군면 외이리)에 들어가 목장 일을 하게했다.

그러나 수초가 부족해 적합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져 동년 11월에 목장은 폐쇠되고 진도민들은 다시 삼촌면으로 돌아왔다.

서남해 각처에 수군진들이 설치 된 후인 1437년 7월에야 진도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삼촌면은 1906년까지 진도의 땅이었다.

해당마을은 감당과 항리, 금산, 용두, 창리, 방축, 비산, 도토, 구미, 송정, 옹암, 목신, 덕정이다.
당시 삼산천 옛 포구의 이름 중에 어란포가 등장한다. 송지면에 있어야할 어란포라는 지명이 왜 삼산천 옛 포구이름에 등장할까.

어란포는 '어란량' 또는 줄여 '난량'이라 했는데 그곳의 수군만호에 관한 첫 기록은 세종원년 (1417년 5월 11일)에 나타난다.

'조운할 때 물건을 남용한 죄를 물어 어란 수군만호 송안(宋安)의 파직' 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에 이미 어란에 수군진이 설치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429년 8월 기록에는 '어란에서 10리 떨어진 해진(海珍)의 남면에 구산성(狗山城)을 쌓았는데 그 안에는 경작할 밭이 있고 물과 샘이 있어 관소를 설치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료에서 등장하는 어란진은 어디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외 조선초 지리지 관방조에는 어란은 '현의 남쪽 34리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으로부터 80여리 떨어진 현 송지면 어란과는 거리가 멀다. 현 해남 송지 어란은 조선시대 내내 영암의 땅이었기에 영암조의 기록에 나타나야 하는데 그 기록도 없다.

각종 지리지에 고 어란포는 '현 해남읍과 25리 거리이며 제주를 왕래하는 배가 머무는 곳이다'고 적고 있어 고 어란포는 송지가 아닌 현 화산면 연곡리에 있었다.

현 고천암호로 흐르는 갯고랑에 있는 연곡다리 양수장의 남쪽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겨울철의 북서풍을 막을 수 있다. '구룡포'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어란포'가 와전된 호칭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화산 연곡에 있었던 어란포가 언제 송지로 이동했을까.
세종실록지리지(1432년)에 해진의 관방조에 어란에 병선이 머문다 하였으며, 영암조에는 '달량'만 있어 세종당시에는 분명히 어란은 영암 땅이었던 송지가 아닌 해남에 있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과 동국여지지(1656년) 해남조에도 고어란포는 남쪽 25리에, 어란포영은 남쪽 34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영암의 관방조에는 어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여지도서(1757년)에 군의 남쪽 15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쯤 송지면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국 수군진을 남쪽으로 전진 배치하는 대 일본 해양방어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근거로 보면 임진란시기에 어란진은 송지가 아닌 화산의 어느 포구에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조에는 어란(於蘭)은 해진군의 삼촌포에 있으며 중선 4척에 군사 4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세종 당시에는 어란이 곧 삼촌포이고 수군진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삼촌포는 고 어란포 즉 현재의 화산면 연곡다리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대형옹관에 시신을 넣는 매장법은 영산강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지만 그 실체는 아직 수수께끼다.
일본의 옹관문화는 큐슈지역에서만 발견되고 기원전 1C~기원후 3C중반으로 소멸시기가 우리의 등장시기와 겹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해남의 대형옹관은 4세기 무렵에 모두 소멸되는데 송지 화산 현산에서도 발견되나 삼산천 주변을 중심으로 해남읍 호천리 신금 농암 목신 옥녀봉일대에 밀집 분포한다.

화산면 부길리와 삼산면 신금·농암에서 발굴된 대형옹관을 보면 긴칼 철덩이 옥 등만 출토된 반면에 마구(馬具)나 금붙이는 발견되지 않아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마한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또 옥녀봉 유적은 집단 주거지·패총·산성·돌무지 등으로 보아 가히 산성도시라 할 수 있다.
이시기와 관련된 세력을 중국에서는 '신미제국'이라 하였다. 한편 일본서기 신공왕후(369년)조에 왜는 '가야7국을 치고 서쪽으로 군사를 몰아 고계진을 점령한 후 침미다례(신미제국)을 도륙하여 근초고왕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국학계에서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왜 연합군에 의해 마한의 잔존세력이 무너지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조사가 3년 전 있었다. 완도 간 4차선 공사 중 삼산면 신금리에서 발견된 100여개의 주거 유적이 그것인데 조성 시기는 4세기로 추정됐다.

특별한 점은 마을이 화재로 소멸 되었는데 당시 귀중품인 그릇과 철기 등 유물들이 그대로였다.
왜 귀중품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전쟁의 결과로 해석된다. 여기에 바다건너 진도 오산리 해안에서도 똑같은 시기와 성격의 유적이 화재로 소멸되어 관심을 끈바있다.

이런 유적들은 369년의 전쟁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삼산면 용두리의 전형적인 일본계 전방후원형의 무덤은 심상치 않다.

해창만의 옹관세력과 전방후원형 세력간 전쟁결과 해창만이 왜에 점령당한 흔적일 수 있다.
그러나 결론은 아직 이르다. 왜냐면 아직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해창만은 한중일 고대 뱃길의 해로상에 있어 왜와 활발한 문화 교류가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며, 삼산천 주변의 포구들과 각처에 흩어져 있는 옹관묘·주거유적·옥녀봉 산성을 비롯한 매장문화재들은 그 미스터리를 풀어줄 열쇠를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선후기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저장한 창고가 있었던 해창.
조선후기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저장한 창고가 있었던 해창.

삼산면 신금마을에서 출토된 토기.
삼산면 신금마을에서 출토된 토기.

송지면 어란진이 임진왜란 시기에는 화산면 연곡에 위치했고 18C에 이르러 현 송지 어란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지면 어란진이 임진왜란 시기에는 화산면 연곡에 위치했고 18C에 이르러 현 송지 어란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산 신금마을 4C 불탄 흔적 주거지.
삼산 신금마을 4C 불탄 흔적 주거지.

4C 전쟁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불탄 집터가 삼산 신금리에서 집중 발굴됐다.
4C 전쟁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불탄 집터가 삼산 신금리에서 집중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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