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때 우수영서 최대 해남사고 발생하다

조선을 구한 명량 물목에 설치된 전라 우수영은 세종대왕때 설치됐다. (우수영 마을전경)
조선을 구한 명량 물목에 설치된 전라 우수영은 세종대왕때 설치됐다. (우수영 마을전경)
656년 3월29일에 부임한 전라우수사 이익달은 가을철 대규모 특별해상훈련을 우후 신숙에게 지시한다. 이 지시에 따라 전라우도 수군에 편성된 고을 즉 금성·영암·무장(고창서부)·강진·부안·진도 등 전선들이 총동원된다. 17곳의 수군진을 제외한 별도의 훈련이었다. 여기에는 해당고을의 군수들을 포함해 각 고을에 몇 백 내지 천여명씩 분산돼 있는 수졸(해군)도 동원됐다. 우수영 포구에 집결한 이들은 8월 15일 드디어 우수사의 통솔 하에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해상훈련을 시작할 무렵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폭풍우로 전선(판옥선)이 모두 떠내려가거나 침몰되고 말았다. 그 중 13척이 난파되고 진도 군수 이태형 외 1000여명의 수졸이 익사했다. 이 사고로 해당 고을과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8월 27일 이 사실을 보고받은 효종은 '하루 내내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며 '특별히 휼전(이제민 구제하는 특별령)을 시행할 것과 아울러 우수사와 우후를 잡아다 국문(중죄인을 임금이 직접신문)했다'는 기록이 '효종실록'에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우수영선생안'에는 '우수사와 우후가 9월 잡혀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건국 이래 전쟁을 제외하면 최대의 해난 사건일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의 창궐로 인해 거제도 진도 등은 왜구의 소굴이 되었다. 이는 섬과 해변50리는 모두 강제 이거시키는 공도정책의 결과였다.

그 당시 전라수영이 초설되는 곳은 고려 말 홍무 10년(1377) 지금의 전북 옥구였으나, 해로(海路)의 중앙이 아니어서 바다를 지키기에 합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408년 무렵 현 함평 사포대교 근처인 대굴포로 이전했다. 그러나 바다가 깊숙하고 썰물시 갯벌이 드러나면 배가 움직일 수가 없어 왜구 출몰시 신속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1932년 10월 무렵 목포로 옮겼다가 다시 8년 후 세종 22년(1440)에 해남 황원곶 즉 지금의 우수영포구로 이설됐다. 그 결과 서남해는 비로소 사람들이 다시 살만한 곳이 됐다.

무인지경 서남해 섬들에 목장이 운영된 것은 1445년이었고 염전 궁토 등으로도 활용되었다. 당시 우수영은 전라도 섬과 해안경영의 총사령부가 되었다.

1467년 전라좌수영이 분할되지만 폐영되는 1895년까지 455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 우수영을 거쳐 간 처치사가 28명, 절도사는 309명에 이른다. 이런 연유로 우수영은 서남해에서 가장 큰 마을을 형성했다.

'호남읍지1865'에 의하면 해남전체인구 1만 6천여명 중 우수영 4마을에 1126호(약 5천여명)였으니 그 위세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반면 목포 인구는 고작 250여명(1897)이었다. 이러한 우수영 관련 연구는 매우 영세하고, 그나마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에 국한되고 있다.

우수영 포구는 L자로 꺾어지는 서남해의 물목의 요충지에 있다. 그 중요성은 이순신 장군이 1597년 9월 15일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좁은 수로를 막아 싸우려한다는 전술을 설명한 뒤 "必生卽死 必死卽生 "란 훈시와 함께 "一夫當逕 足懼千夫(한사람이 좁은 물목을 지키면 천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있다. 조선을 구한 명량의 물목에 전라수영 설치는 세종대왕의 탁견이었다. 우수영의 포구는 남문밖에 있었으며 조선후기 그 곳에 판옥선 3척 등 병선 18척과 나룻배 24척이 상주하였고 선소(뱃공장)도 있었다.

조선후기 지방도에는 우수영 포구가 남문에서 서하리 사이의 바닷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곳은 갯벌이 아니고 평평한 갯바위이었으며 앞에는 섬 양도('명량도'의 준말)가 울돌목의 거센 조류와 태풍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해 포구로서는 천혜지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황원의 주량은 우수영 포구와 동일포구로 간주돼 왔었다. 황원의 '주량'을 '우수영'으로 동일시하는 근거는 1432년 10월 "대굴포의 전선을 목포로 옮기고 목포의 병선을 황원의 남면 주량으로 옮기라"는 '조선왕조실록'이 발단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전라수영이 1440년 목포에서 당시 영암땅이었던 현 우수영으로 옮길 당시에는 황원곶으로 옮겼다고 할 뿐 주량이라 명시하고 있지 않다. 또한 우수영이 설치된 1440년 이후의 각종지리지에도 우수영과 주량이 별도로 등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동국여지승람 1481'과 '동국여지지 1656'등에 주량은 '현 서쪽 75리' 우수영은 '현 서쪽 67리'라고 거리까지 다르게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량은 어디일까. 다행히 '호남읍지 19C말'에 주량은 '현 서쪽 75리' '별진포(계곡 성진)의 하류이며 등산진(화원 구림리)위로 땅이 다한 곳에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주량이 황원곶에 있는 것이 분명하나 우수영은 아니고 위치·거리로 본다면 옛 황원현 읍치였던 고당 포구 또는 별암 인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확한 곳은 알 수 없다.

우수영 관할은 조선전기에 14관(고을) 13포(수군진)에서 조선후기 들어서는 7관(해남 진도 영암 나주 무안 함평 영광)과 17포(완도 가리포~전북 옥구·군산진)에 분산되어 있는 수군을 통솔하고 지휘하던 총사령관이다. 전라좌수영의 5관 5포에 비하면 그 위세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수령인 우수사는 정3품 당상관으로 세종 2년(1420)에는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 약칭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라 했다가, 세조 12년(1466)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개칭되었는데 약칭 '수사' 또는 '곤수'라고도 했다. 곤수는 '대궐 밖의 신하'라는 뜻으로 '대궐밖의 모든 일을 맡는 장군'을 말한다. 그 밑에는 종 3품 무관인 우후 1명, 도만호 2명과 종4품 무관인 여러 만호(萬戶)가 있었다. 참고로 해남현감은 종 5·6품에 불과했다. 우수사 역할은 서남해 방어 외 25처의 봉화와 목장관리, 세곡의 수납과 호송, 소나무밭 관리와 전선의 건조 등인데 그 위세는 변방의 절대권력자 즉 '곤수'라는 직함에서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칠천량 해전(1597.7.16)에서 궤멸되고 명량해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임란 때 거북선이 우수영 포구에 없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거북선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종실록' 13년 2월(1413) 기록에 "태종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또 15년(1415) 기록에는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근거로 보면 거북선은 늦어도 태종조나 고려 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우수영포구와 거북선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옛 기록을 살펴보자.
선조 39년(1606) 12월 나대용이 이르기를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기해년에 새 전선 25척을 감조(監造)하였을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다(선조실록)는 기록에서 두 가지가 주목된다. 임란 후 나대용은 덮개 없는 거북선 즉 '창선'(1640년대 그림참조)을 만들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1605년 거북선이 각 영에 한척씩 있다"는 언급은 18세기 저서인 '속대전'의 "우수영에 1척"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만기요람 1808'에서는 2척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감안할 때 임진왜란 직후 우수영에 거북선이 배치됐음을 알 수 있다.

우수영 바다의 철쇄설치 논란은 찬반이 분분하다. 김억추 장군 가계기록과 구전설화, 일본인의 연구 자료는 철쇄 설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난중일기 미 기록과 12노트의 거센 조류를 견딜 철쇄와 끌어당기는 힘의 부재로 불가능을 들고 있다.

'영조실록(1754.7.23)'홍자의 서첩에 의하면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 바다어귀에 철쇄설치 ~"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철쇄는 우수영을 가르고 설치된 것이 아니라 우수영 포구의 어귀 즉 서쪽 좁은 입구에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수영 포구민들은 추석 달밤에 강강술래, 정월대보름 밤에는 용잡이 놀이라고 하는 두 가지의 집단 민속놀이를 즐겼다.

그 중 용잡이 놀이는 한마디로 독특한 줄다리기라 할 수 있다. 용은 80여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짚줄다리기인데 주민들은 설을 지낸 후 곧바로 만들기에 들어간다.

꼬리부분은 지네발, 머리부분은 용머리와 같이 만들고 상여와 유사하게 치장한 후 청사초롱을 매달아 불을 켜는 점이 특이하다.

대보름 휘영청 달빛 속에 수천의 사람이 모이면 용잡이 놀이가 시작된다. 머리부분에 올라간 사람이 메기는 소리를 하면 용을 맨 동체꾼들은 받는 소리를 하면서 걸궁과 함께 마을길을 휘젓고 다닌다.

그런 후 용머리부분을 떼어낸 몸체로 줄다리기를 한다. 치마저고리 다 헤지고 짚신은 벗겨져 발바닥이 문러질 정도로 억시고 치열하게 진행되지만 워낙 즐거워 웬만한 시비는 장난이고 상처는 날 샌 다음에야 깨달았다.

흥을 돋우는 술과 음식은 자발적으로 나오고 용을 불태우며 마을안녕과 용신께 비와 풍요를 기원하는 뒤풀이로 10여 일 간의 대단원의 막은 내린다.
대동단결 하나 되는 용잡이 놀이는 6.25 직후까지 해마다 거행되다 중단이 되었다.

우수영포구민들의 용잡이 놀이는 진정한 축제의 진수를 보여준다. 주민주체협의 끝에 장기간의 준비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공동 의례로 우수영포구민들은 하나가 되어 갔다. 이러한 저력은 대첩비의 재건운동과 우수영 자주독립만세운동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남해 해양경영의 총사령부였던 우수영의 포구의 참역사와 민속은 세속에 묻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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