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포구 고대 한·중·일 교류 거점항 역할
고대도시 백포, 청자단지 화원 해양문화 꽃피워

한국은 '방방곡곡(坊坊曲曲)'
일본은 '진진포포(津津浦浦)'

한반도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있으면서 문화 교류를 매개하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해 왔다.
고대국가였던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바다를 둘러싸고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펼쳤고, 완도 청해진에서 활약한 장보고에 이어 서남해안의 해양 패권을 장악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최후 승자가 됐다.
삼국시대 이어 고려도 해양강국의 면모를 과시하며 바다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진취적이고 도전의 대상이었던 바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장애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해 섬사람들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켰고 해상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 육지중심의 정책을 펴나간다.
이를 두고 강봉룡(목포대)교수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개방의 코드였다면 조선시대는 폐쇄의 코드"라고 표현했다.
조선의 이 같은 해금정책에 반해 서양의 역사는 16세기 이후 '대항해 시대'를 힘차게 여는 진취적인 도전정신으로 근대화를 선도해 나간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이를 선진적으로 수용한다. 해양을 장애물로 여긴 조선은 결국 폐쇄적인 정책 때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수난을 겪고 이후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시대를 초래하고 만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한국은 무분별한 간척사업으로 뱃길을 단절시키고 찬란했던 옛 해양문화마저 소멸시키고 있다.
우리는 전국을 지칭하는 관용어로 '방방곡곡(坊坊曲曲)'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반면 일본은 '진진포포(津津浦浦)'라는 표현을 쓴다. '방방곡곡'이란 말에는 육지 중심적 관념이 '진진포포'란 말에는 해양 중심적 관념이 내포돼 있다.
해남지역 문화는 국가의 해양 정책에 따라 흥망성쇠를 같이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의 활발한 교류 시에는 그 중간 거점 항으로 흥성했지만, 조선시대 해양이 천시되면서 오히려 잦은 왜침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고대바닷길에서 해남은 서해와 남해를 L자로 연결하는 요충지에 있어 한·중·일 고대문화 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중국 남부의 절강성 복건성 등에서 출발한 배들은 흑조해류의 흐름에 따라 북동진하다 화원·산이반도 해안선의 포구에 이른다.
옛 중국 배들이 드나들었던 곳에는 선진문화가 전래되었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현산 고담 고다산성
현산 고담 고다산성
옛 포구는 해양문화의 정보캡슐

포구(浦口)는 '강이나 바다의 어귀로 배가 드나드는 곳'을 일컫는 용어이다. 또 '포구(浦口)'라고 하는 자연환경적 요소에 인간의 창조물인 '배(船)'라고 하   는 인공적 요소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포구는 '물과 배 그리고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문화 공간'으로 즉 '물길과 뱃길 중에서도 인간의 삶이 스며있는 공간'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길에서 뱃길의 중심인 포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지형적으로는 물과 육지(뭍)가 만나는 접점으로 물이 내륙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둘째, 오랜 인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문화의 발상지이자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인 황하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이집트 문명 들은 황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나일강을 끼고 있어 가능했다.
셋째, 포구는 문화교류의 접점이자 관문의 역할을 했다. 고대부터 뱃길을 통한 문화의 교류는 매우 활발했다. 물류만이 아니라 외부의 새로운 문화와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포구였다. 흔히 포구주변에는 장시가 열렸으며, 파시와 같은 한시적 장시가 형성되기도 했다. 즉 문물 교류의 장이자 문화 통로의 장, 문화의 거점이기도 한 것이다.
넷째, 첨단 항해술 조선기술 어로기술 등 생산문화의 발전 전승지의 구실을 했다. 역사적으로 첨단 조선기술과 항해술을 지닌 나라만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듯 그러한 기술을 발전시킨 공간이 포구였다는 점이다.
물과 육지 그리고 인간이 만나는 포구는 인간의 삶의 터전이자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가 끊임없이 교류하고 새롭게 탄생시켜 발전시키는 등의 인류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포구는 인류역사의 총체적인 정보캡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핵심공간이었던 포구는 관심 밖으로 밀어냈다.
바다와 포구를 멀리했던 이러한 흐름은 일제강점기 이후 육지 공간의 증대를 위해 많은 물길을 막아내는 간척 사업으로 귀결됐다.
이러한 흐름에는 해남에서 더욱 더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Ⅲ-2 대규모 물막이 공사로 물길과 뱃길이 막히고 그로인해 옛 포구도 대부분 사라지게 됐다. 옛 포구의 파괴는 포구에 담겨진 오랜 역사와 문화도 급속히 사라짐을 의미한다.

화원 초기 청자 가마터
화원 초기 청자 가마터
고대 해남, 해양문화로 꽃피어

해남지역의 옛 포구의 흔적은 5개의 고대문화권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현산 백포만을 중심으로 한 고대문화권이다. 백포만은 신석기부터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패총과 대형옹관묘가 분포돼 있다.
이곳에서는 중국, 일본, 백제, 가야 등과 관련된 유물·유적들이 분포돼 있어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같은 폴리스(polis)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새금현)와 고려시대(해남현) 때 해남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두번째는 해창만의 고대문화권이다. 이 문화권에서는 옹관고분과 읍 남성리 앞산의 옥녀봉 토성, 삼산 용두리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된다. 전방후원분의 묘 형식은 일본 고대의 무덤 형식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읽을 수 있다.
해창만 일대에 포함되는 삼산면은 한 때 진도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서남해안에 자주 침입해 오는 왜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고려말 조정은 진도사람들을 영암으로 강제 이주 시켜버린다.
1409년에 이르러 영암에서 살던 진도 사람들은 진도와 조금 더 가까운 삼촌면인 옹암과 송정 등 삼산면 8개 마을로 옮겨오게 되고 1437년에 이르러서야 진도 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들이 살았
던 삼산면 일부지역은 1906년까지 진도군에 속하는 땅으로 남게
된다.
세 번째는 해남동부해안권의 고대문명이다. 이곳은 강진만의 하류인 내동만으로 서쪽 해변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북일면에 있는 거칠마 산성과 북일 방산의 전방후원형분, 원일마을의 방형과 원형 고분, 신방리의 즙석분 등 십수기의 고분들이 형성돼 있다. 이곳은 현산 월송리 조산고분과 함께 일본과의 교류를 알 수 있는 곳이다.
네번째는 영암호 주변의 고대 문화권이다. 이곳은 1992년 간척이 되었는데 중심문화로는 최근 밝혀진 옥천 들녘의 백제시기 고분들과 마산면 화내리와 장촌리 일대의 죽산(竹山) 폐현이다.
이 폐현은 백제시대에 고서이현(古西伊縣)이었고 통일신라 때에는 고안현(固安縣),  고려 때는 영암군에 예속되었다가 조선에 이르러 해남현에 내속된 곳이다.
다섯번째로 1994년 간척 호수된 금호호 주변의 문    화권이다. 이곳의 특징은 청자 문화로 대표할 수 있다. 화원면의 신덕·금평리 초기청자 가마터와 산이면의 철화청자 가마터가 그 중심지이다.
이곳은 당시 중국의 첨단세라믹 기술이 수입돼 국내최대의 공단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의 문화 중심은 현 문내면 고당리 일대의 황원군(黃原郡)이다.
이곳은 본래 백제의 황술현(黃述縣)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청해진과 함께 양무군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초에는 황원현에서 황원군으로 승격돼 영암군에 속했다가 1448년 해남현에 내속 됐다.

삼산 신금마을 출토 고대유물
삼산 신금마을 출토 고대유물
해양문화는 해남의 미래

해남지역의 옛 포구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등 20여 곳에 기재돼 있다. 이러한 기록 수는 타 시군에 비해 몇 곱절에 해당된다.

▶백포만 지역의 포구에는 갈산포(葛山浦, 명량해협 안전항해의 기도처) 어란포(於蘭浦, 수군진과 제주항해의 육지부 최남단항) 군곡포구(철기시대 백포만 포구도시의 중심 국제항) 남포(南浦,백제~고려시기 고해남의 중심포구)가 있다.  
▶해창만 주변의 포구에는 관두포 (관머리 중국이나 제주도 가는 배를 탔던 곳), 종천포(학관이 세를 받던 곳), 백야포(白也浦, 고려시대 염창 소재지), 해창(해남의 세곡 저장소), 삼촌포(三寸浦, 옛 제주기항지이자 수군기지), 용두포구(고대 해창만 거점 포구), 어성포(魚成浦, 은어 장어 서식지)가 있다.
▶동부해안 포구로는 달량진(조선초기의 수군진과 1555년 왜의 침략처), 이진(수군만호진이자 제주도 뱃길의 거점항), 구산천 포구( 백제초기 왜와 교류의 거점항) 등이 있다.
▶영암호 주변의 포구로는 화내포구(백제∼고려시기의 거점 포구), 죽성포(고려 12대조창 장흥창 추정지), 별진포(別珍浦 육로 별진역과 해로의 교통요지로 상선 정박)가 있다.
▶금호호 주변의 포구에는 진산포구(해남산이 청자의 수출 거점항구), 황원포구(황술현의 읍치 금호만 거점 포구), 청룡포구('화원 초기청자' 공단의 수출항), 등산진(登山津현 목포와 연결된 포구), 당포(唐浦, 남북국시대 당나라 출항지), 대진(大津, 영산강 수로의 험난한 물길) 주량(周梁, 조선 수군기지 서남해 문화의 중심), 명량(鳴梁, 조선 3대 험난한 협수로 물목) 벽파진과 삼지원, (진도의 관문 삼별초 토벌군의 집결지), 입암포(笠巖浦,근대 일제시기의 수탈항, 제주선 중간 기착지)등이 살펴진다.
위에서 언급한 포구들은 해양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그 특징은 한마디로 개방성과 진취성, 다양성, 국제성으로 함축된다.
포구 조사 및 연재는 당시의 찬란한 해양역사문화를 찾아내 동북아 해양강국의 꿈을 실현할 동력으로 삼아야할 필요성 때문이다.
세계 석학들은 2020년이 되면 세계 최강국으로 중국이 부상할 것이라 예견한다. 동북아 중심의 신해양문화의 부흥기를 일컫는 일이다.
따라서 고대해양문화의 흥성기의 중심이었던 나루와 포구의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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