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읍 연동리 녹우당(下)
효종이 하사한 사랑채 '녹우당'

 녹우당이 처음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고산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 윤효정(尹孝貞,1476∼1543)이 백연동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이 집의 역사와 건축형태는 지금까지 장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중건을 하고 또 보수 등을 거듭하면서 오랜 세월을 이어와 지금의 녹우당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처음의 건물 역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어초은이 연동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 대략 15세기 중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이어온 것으로 보고있다.
 현재 녹우당의 영역속에 있는 주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과 좌측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초은 추원당(追遠堂)이 있다. 또한 이외에도 고산서원과 후원에 별당채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집의 배치와 구조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서향을 하고 있다. 먼저 남동향으로 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 나온다. 이곳에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채(사랑채는 현재 해체 복구중)가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침방, 사랑방, 대청이 ‘ㅡ’ 자로 늘어선 형태로 전면처마에 햇빛을 차단하는 차양이 달려있다. 사랑채 전면에는 방형의 연못이 파여져 있고 각종 수목이 잘 가꾸어져 있어 조선시대 사랑채의 남성공간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를 이룬 ‘ㅁ'자형의 구조를 이룬다.
안채 좌측 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진 곳에 장독대와 곳간들이 있어 여성만을 위한 공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안채 뒷편에는 과실수가 심어져 있는 넓은 후원(後園)이 형성되어 있다.
 사랑채가 남성들의 공간이라면 안채는 안주인과 여성들의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 녹우당도 안채의 각 방의 용도에 따라 기거하는 신분이 달랐는데 안방은 안주인이 차지하고 나이가 들어 며느리에게 실권을 넘기면 건너방으로 가서 기거했다고 한다. 또한 집의 모서리에 위치하여 ‘못방'이라는 방은 며느리가 거처하였다. 현재는 옛날의 생활방식과는 달라져 집의 주인인 종손내외가 안채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와 함께 녹우당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 사랑채라 할 수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사부(師傳)였던 고산에게 하사하여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사랑채는 상량문에 철종 9년(1858)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지금 전면 해체된 후 복원을 통해 건물을 다시 짓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해체되기 전 사랑본채는 4간집으로 좌·우측에 각각 2간씩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특이한 것은 건물의 전면에 사랑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차양을 설치하고 있는데 이는 어초은 추원당을 비롯하여 고산 제각 등 해남윤씨가 관련 건물에서 볼 수 있다.
 사랑채는 아랫방 웃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성들의 공간답게 아랫방은 밤에 가장의 침실역할을 하였고 웃방은 외부의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잠자리로 사용되었다.
 또한 골방은 옷을 갈아입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약을 집적 조제, 처방할 수 있는 약을 보관해둔 약장이 있는 등 다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작은 사랑방이 있어 이곳에 장남이 기거하였고, 옆방에는 책이나 중요한 문서를 보관해 두었다고 하며 윤씨가의 고문서나 화첩 시문 등이 이곳에 잘 보관되어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유교생활의 중심 사당

 조선시대 유교생활의 가장 큰 덕목중에 하나가 조상숭배로 그 흔적을 잘 엿볼 수 있는 곳이 사당이다.
 이곳 녹우당의 사당은 고산 사당이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사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천지위는 보통 국가의 공이 인정될 때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시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은 입향조인 어초은공과 불천지위인 윤고산의 사당을 따로 지었다. 그리고 집안 동쪽에 사대조를 받드는 안사당이 있다.
  현존 5대봉사를 하고 있는 안사당은 순종21년(1821)에 세웠으며 그 1년 뒤인 순조 22년(1822)에는 어초은 사당을 중수하였다. 이와 함께 행랑채는 보통 주인의 집안 일을 도우며 사는 하인들이 살던 곳으로 녹우당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ㄱ'자형의 문간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방과 곡간, 마굿간, 부엌등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녹우당에서 눈여겨볼 곳이 유일하게 초가로 남아있는 사랑채 옆의 측간이다. 이 측간을 보면 당시 신분사회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당시는 농업사회로 이곳에서 나는 분뇨를 거름으로 활용하였는데 양반과 아랫것들의 사용하는 층이 상하로 구별되어 있다. 그래서 양반이 일을 보는 곳은 나무로 되어 있는 재래식 형태지만 아랫것들이 일을 보는 곳은 돌만 양쪽으로 놓여 있었다.
<◇ 녹우당의 사랑채 - 녹우당의 상징적인 건물로 현재 전면 해체를 통한 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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