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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북평면 묵동마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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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석
등록일
2014-08-27 15:43:56
조회수
6840
묵동마을 역사

달마산을 주산으로 안산인 중마산아래 위치한 묵동은 구골로 둘러있다.

중앙에 서당골로 동리가 이루어 졌으며 불당골, 독골, 오래골, 구승골, 성죽골, 가장골,

아랫가장골, 작은목골, 서당골 이다.

불당골에는 사찰을 지어 불심을 높였으며 서당골에는 서당을 지어 인재를 양성하였고

인근 유명인들은 이곳 서당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앞 개천가에 귀목나무를 심고 중앙(사장둥)에는 팽나무를 심어 액운을 막았으며

아래 똘뚝에 장대석(남근석)을 세워 남자가 번성하게 하였다.

구골은 구천이다.(아홉겹으로 쌓인땅속 혼이들어가는땅) 천하의 명당으로 꼽힌다.

서당골은 조선조때 영암군 북평면 서당골이었으며 일제강점기 행정개편으로

서홍리 묵동으로 개명하였다.

구골에는 물이항상 흘러 가뭄걱정이 없었으며 풍요로운 삶을 이어갔다.

서당골, 아대미에는 동리 우물을 만들어 식수가 풍족하였고, 어머님 "샘" 인심이 이곳에서 나왔다.

가뭄걱정없이 농사도 년년히 대풍을 이루었으며 일찍이 간척을 하고

수문을 만들어 수량(밀물,썰물)을 조절하여 옥토를 갖게 되었다.

인근이 해변이라 항만으로도 발달 하였다.

고려때 몽골말을 제주에 방목하여 군마로 키웠는데 개경이나 한양으로 군마를 이동할때

초지가 좋고 넓은 말밭에 잠시 방목하였다가 저녁에는 동리(묵동)골목에 갇어놓고

푸짐한 인심에 숙식제공 받고 이송하였다.

어족 또한 풍부해 해변가에 독살을 만들어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

독살이 발달하여 후에는 그물로 개매기(개막이)사업으로 큰어업을 이루었으며

개매기는 박생기, 오현식 선생이 개발 발전 시켰으며 인근 4개군(해남,완도,진도,강진)에서

제일 발달 하였다.

해초도 풍부하였고 김양식업은 풍요로움을 더해주었다.

농업과 어업이 발달하니 원근에서 여러성씨의 시람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작은마을(100여호)에 각성씨가 많다.

지금까지 마을에는 전, 신, 고 +4(각다른집안),백, 오, 김+5,박+3, 이+2, 조, 임+2,

최, 유, 부, 안, 정, 서, 장씨 등이 살았다.

살기좋은 땅에는 사람뿐아니라 혼령도 따라다닌다. 임자없는 혼령을 위하여

일찍이(약500년 부터)마을에는 헌신제를 지냈다.

정월 대보름에 동네수호신, 똘뚝나무, 남근석, 사장께 우, 아래, 우물에 제사를 지내고

저녁에는 마을 앞에서 헌신제와 농악놀이를 한다.

하지만 2012년부터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제는 5월 효의 달을 맞아 전통을 살리면서

효를 겸한 헌식제 행사 와 효잔치를 겸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도 해남군 문화광광과에 등록하여 매년 군 지원으로 마을 축제로 진행하고 있다.

(헌신굿)

농악도 전통이 있어 원근에서 배우러오는 사람이 많았고 완도 등지에서

농악경연대회에 왔다가 묵동농악놀이에 기를 못펴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전성기 농악명인으로는 상쇠(임동근,박동기, 최낙담, 유인복), 설장구(박정배),

태평소(박평기), 북(박천환), 소고(고산운) 선생등 명인들을 배출하였으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농악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길이 발전하길 바란다.

보름 헌신제는 오래골 맑은물로(제일윗샘) 제밥과 제주를 빚어 각호 마다

특유의 농주와 오회열가의 광화주는 민속토속주로써

특허를 낼만한 별주다. 도발-선창해변의 비경은 초등학교 봄가을 행사인 소풍오는 곳이다

오목조목하는 해변의 절경은 해남 대둔사 유선관과 함께 신선이 놀만한 비경이다.

앞뒷산에 사시절 꽃피고 술맛좋고 풍악좋고 풍요로운 이땅이 "무릉도원" 이 아닌가 한다
작성일:2014-08-27 15:43:56 210.94.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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