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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씨로 본 해남의 역사-3.부춘동 사람들과 피화(避禍)한 성씨들사화 피해 해남에 낙향한 7성씨들
윤영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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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5.03.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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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해김씨와 선산김씨, 동복오씨, 해남윤씨 등 재지사족들이 의병으로 활동한 것을 형상화한 조각. 〈문내면 명량대첩지〉 

“해남은 비록 명칭은 현이지만 산물이 많고 지역이 크며 토호가 많고 양영 사이에 끼여 있어 본디 다스리기가 어려운 고을이라 일컬어져 왔습니다.” <선조실록>
  선조실록에는 2차례에 걸쳐 해남은 토호들이 많아 다스리기가 어려워 뛰어난 문관을 보내야 한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해남 우슬재와 아침재에 얽힌 구전을 보면 해남의 토호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풍수지리에 밝은 김서구(1782∼1783)란 현감이 해남에 부임해 금강산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청룡, 백호, 현무의 명 형국인 탓에 항상 토호 세력들의 기세에 눌려 살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 형국을 깨뜨려야 토호 세력들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슬재를 석자 석치씩 깍아 내렸다. 마산면은 원주이씨, 선산임씨, 여흥민씨 등이 거주하고 있어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드리러 다녀 아침재가 생겨났다는 구전은 해남의 토호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계유정란을 피해 낙향한 순천김씨 대표 사우인 계곡 방춘서원.15세기 이후 해남정씨를 비롯한 토착세력들이 점차로 약화되고 혼인이나 다른 사유로 내거한 성씨들과 정치적인 격변기에 피화한 성씨들이 해남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15세기초까지 해남정씨와 차씨, 송씨, 윤씨 등 토착성씨들이 행정 구역별로 향촌사회를 장악했지만 15세기 중반이후 해남정씨와 혼인관계를 맺어 해남으로 옮긴 선산임씨, 여흥민씨, 이속가, 탐진최씨, 해남윤씨와 15세기 후반 이후 이들과 또 혼인관계를 맺은 장흥임씨, 무안박씨, 선산유씨, 언양김씨 등이 향촌사회를 장악했다.
  보은이씨는 제주목사로 임명된 이운이 15세기 전반에 화산 송산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과는 다르게 정치적인 격변기에 해남으로 낙향한 성씨들도 생겨났는데 15세기 중반 계유정란을 피해 낙향한 원주이씨, 순천김씨, 통천최씨 등이 그들이다. 원주이씨는 계유정란 때 김종서와 연루돼 4부자가 참화를 당하자 강원도 원주에서 벼슬을 하던 이영화가 해남 마포 오호강변(현 마산 산막리)에 막을 치고 은둔한데서 유래했다.
  순천김씨 역시 계유정란을 피해 김효우·효손 형제가 해남으로 낙남했는데 효우는 계곡면 방춘리에, 효손은 산이면 구성리에 터를 잡았다. 16세기 초반 무오사회를 피해 김해 김씨 김하는 유모 신씨의 등에 업혀 해남읍 고도지를 거쳐 산이 노송리로 옮겼다.
  같은 시기에 청주한씨 한세전이 갑자사회를 피해 삼산면 상가리로 낙향했다.
 16세기 중반 선산김씨 김견이 을사사회를 피해 삼산면 항리에 거주하게 됐으며 그의 셋째 아들 인영은 삼도수군방어사로 정유재란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다.
  동복오씨 오빈도 을사사회를 피해 계곡면 용지리에 정착했으며 그의 후손 중에 극신과 홍적이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순절했다. 16세기 중반 밀양박씨 박관이 해남향교 훈도를 맡으면서 읍 해리에 정착했으며 연안이씨 이선경이 강진에서 이거해 삼산 충리에 자리를 잡았다.
  무안박씨 입향조 박종정은 16세기 중반 영암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을 사랑하여  해남으로 이주 읍 해리에 정착했으며 그의 아들 박안은 선산임씨의 여서(女壻)가 됐다.
  이 성씨들 중에 해남정씨와 선산임씨, 해남윤씨, 선산유씨 등은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 수령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여흥민씨, 김해김씨, 장흥임씨, 보은이씨 등은 해남향교 중수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지역의 토호로 성장해 수령권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지위를 확보했다. 
 ◇ 김해김씨 삼현파의 충절을 상징하는 산이면 노송리 옛 소나무. 명종실록에는 상주목사로 뽑힌 윤행(원)은 윤복(원)이 해남에 살면서 해남현감이 하는 일을 사의로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미임일기에는 유희춘이 해남에 47칸의 집을 지으면서 해남호장 송원용에게 숯을 청구했으나 거절하자 현감이 곤장을 치고 호장의 직책을 파면했으며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해 당시 관직에 진출한 사족들의  영향력이 향리들의 생사여탈권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토착성씨들과 내거한 성씨들의 갈등은 정유재란 때 토착성씨들이 왜군을 꼬여 지방 사족들을 죽였다는 내용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으며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협조한 이들을 붙잡아 처형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재지사족들의 권력이 수령을 교체하고 향리들의 생사여부에까지 미치게 되자 토착성씨들인 향리들이 내거해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성씨들을 정유재란을 통해 왜구의 힘을 빌려 죽였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토착세력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조선 전기에 입향한 성씨들은 18개 성씨로 정유재란을 기점으로 토착성씨들을 누르고 해남을 지배하는 성씨들로 등장했다. 이 성씨들 중 김해김씨 여흥민씨 원주이씨 무안박씨 해남윤씨 등은 현재까지 해남의 다수 성씨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변방의 왜진곳, 땅 끝에 지나지 않았던 해남이 조선초가 되면서 학문과 문학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조선의 군현제 개편 과정에서 강력한 토호로 성장한 해남정씨와 그와 혼인관계를 맺은 성씨들이 해남에 정착하면서 해남의 문학적, 학문적인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해남 학문의 시대를 연 금남 최부 이래로 귤정 윤구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 취죽헌 박백응 고산 윤선도 등 해남육현이 문장과 학문에서 꽃을 피웠다. 그러한 학풍과 문학적인 배경과 땅끝이라는 지리적인 자양분은 서정시인 이동주, 민족시인 김남주, 여성주의 작가 고정희를 배출했고 김준태 김지하 황지우 등의 시인들과 소설가 황석영이 문학의 산실로 해남을 삼았으며 수많은 문인들이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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