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호에 있을 가능성 커 수중발굴 서둘러야

고려초 11세기 중반 산이면 진산리 도요지에서 청자병과 대접 등을 가득 실은 10톤급 상선이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 바다에서 거센 태풍을 만나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천년이 지난 후 1983년 12월, 어두리 앞 바다에서 키조개 채취작업을 하던 잠수사들이 몇 점의 옛 그릇을 건져 올렸다. 보물선으로 불리던 신안해저 발굴이 끝나 갈 무렵이라서 전국적으로 관심을 끌었고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생산된 해남자기들이 쏟아져 나와 천년신비 해남자기의 비밀이 벗겨지지 시작했다. 11세기 초에 만들어진 청자병과 청자장고와 청자 대접 잔 등 3만여점의 도자기가 발굴돼 해남자기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 초기청자의 발생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초를 마련했다. 화원 달산 인근 해변에서 수많은 자기편을 해안가 뻘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보물선이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금호호다. 2년전부터 줄기차게 금호호 안에 고려초기 해남청자의 베일을 벗길 열쇠가 될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는 설이 향토문화를 연구하는 이들과 어민들 사이에서 떠돌기 시작해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는 것이다. 군민들 사이에서 금호호 안에 고려시대 배가 침몰돼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방조제 공사가 끝나고 바닷물이 담수화 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재첩을 잡으면서부터다. 바닥을 긁는 재첩잡이 어구에 도자기들이 걸려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한 어민이 특이한 것들을 모아두었다고 해 집을 찾았다. 그 어민은 이상하게 생긴 것 모두 모으다 보니 3가마 정도 됐다며 올라오는 장소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산이면과 화원면 문내면 인근이 보물선이 있을 법한 장소로 이곳들은 준설을 하지 않아 보존돼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바닷속 보물선에 대해 관심이 큰 것은 육지에 비해 그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쫓는 신기루 같은 것이기도 하다. 금호호 안에서는 11세기 진산리에서 생산된 청자병과 청자대접, 청자장고 등이 걸려 올라왔으며, 무안선에서 인양된 14세기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운학문대접 등 대접과 병이, 흑유와 백자들이 무더기로 몇몇 장소에서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진산리에서 생산된 해남청자는 생활자기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역상감 장고는 감정가가 12억원으로 진품명품 최고가를 기록했으며 청자병이나 매병, 연화문대접 등은 강진청자와는 다른 해남청자만의 멋과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해남자기를 연구해 온 변남주씨는 금호호안에 매장된 자기는 청자가 발생한 화원면 신덕리와 해남청자가 꽃을 피운 산이면 진산리 산일 가능성이 커 해남자기 연구에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직 진산리 가마터가 누구에 의해 운영됐는지, 생활자기만 생산됐는지, 12세기 까지만 운영됐는지, 생산주체 세력이 누구였는지 생산품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여전히 베일에 쌓인채 발굴되지 않고 훼손되고 있다. 이웃 강진의 상감청자와 또다른 멋을 지닌 해남청자가 빛도 보지 못한 채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해남청자에 대한 조사와 재현을 위해서 금호호안의 진산리배 발굴이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물선은 신안배이다. 1975년 신안군 증도 앞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들이 걸려 올라오면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수중 발굴로 14세기 초 원나라 경원을 출발해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에 실렸던 도자기 2만여점과 729점의 금속제, 자단목, 동전 등이 인양됐다.  뿐만 아니라 무안군 도리포 앞바다에서 인양된 무안선은 14세기경 강진 사당리 것으로 추정되는 상감청자가 639점이 인양됐다. 해상교통의 중심지인 서남해안은 고대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거대한 수중유물관이라 할 수 있다. 해남 해역 곳곳에도 수많은 고대 유물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금호호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선은 진산리 해남청자의 천년의 신비를 벗길 열쇠여서 수중발굴이 시급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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