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독립영화감독)

 
 

나는 열네 살에 해남을 떠났다. 가족들은 1년 전 먼저 서울로 이사를 가고 언니와 둘이서 자취를 하다가 겨우 전학이 되어서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차가 너무 많아 놀랐다. 고향마을에서는 버스가 하루에 몇 대 안다녔는 데 서울에 오니 서로 다른 번호판을 단 버스가 너무 많이 다녀서 여러 번 길을 잃었다.

그런데 버스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놀림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전학생들이 그러는 것처럼 칠판 앞에 서서 인사를 하는데 해남 말투에 반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내 자리에 몰려와 말을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1년이 넘는 기간 말없는 아이로 지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몇 주 동안 열심히 서울말 연습을 했다. 1년 먼저 서울에 온 3살 아래 남동생이 서울말 대화상대가 되어줬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서울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첫 번째 혀, 사투리를 어찌나 혹독하게 숨겼는지 나는 가족들과 얘기할 때도 사투리는 쓰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투리를 '첫 번째 혀'라고 부르는 전남대 백승주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이 '첫 번째 혀'를 버리는 이유는 '힘' 때문이라고 한다. 힘이 약한 집단에 속해 있어서 힘센 언어의 위세를 빌린다는 거다. 맞다. 나는 약했다. 전학 온 지 사흘 만에 단소 시험을 본다는데 황산중학교에서 단소를 배운 적이 없었다. 각자 다룰 수 있는 악기로 연주를 하는 음악시험을 본 적도 있었다. 나는 피리를 불었는데 그때 첼로를 처음 봤다. 서울살이는 자꾸 나를 쪼그라들게 했다. 태능시장에서 엄마가 사준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는데 늘 맨 뒷자리에 앉는 애가 "짜가 신고 왔다"며 웃었다. 그 애는 그냥 웃었을 뿐인데 그때부터 나는 내 발을 부끄러워했다.

서울 생활이 혹독해서였는지 늘 해남을 그리워했다. 해남에서는 신은 신발이 나이스인지 나이키인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해남에서 내가 쓰는 해남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만약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에 서울에 갔어도 그렇게 쪼그라들었을까. 대학생이 되어서 서울 사는 친구들을 만났더라도 그렇게 입을 닫았을까. 가끔 나의 말과 성격을 단숨에 바꿔버린 청소년기를 생각해보곤 했다.

그리고 서른다섯 살에 해남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벌초 때나 상을 당했을 때처럼 용무가 있어 잠깐 들르는 것 말고 단지 해남을 보고 해남을 즐기기 위해서 간 것은 처음이었다. 겨울인데도 따뜻했고 땅이 빨갰다. 빨간 땅에는 배추가 파릇파릇했고 그 배추를 캐는 사람들이 밭마다 가득했다. 그 뒤로 여러 번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보고 싶어서 해남을 찾았다.

아직도 나의 '첫 번째 혀'는 깊이 숨겨져 있다. 아이러브스쿨이 유행일 때 초등학교 동창회를 갔는데 억지로 만든 '두 번째 혀'도, 숨겨놓은 '첫 번째 혀'도 편하지 않아 말을 거의 안 했다. 그런데 몇 년 전 SNS로 사귄 친구가 해남 말이 예쁘다며 자꾸 연습하는 걸 들었다. 예뻤다. "자기 말 버리고 서울말 쓰는 사람은 간사해 보인다"며 굳건하게 해남 말을 쓰는 강한 엄마를 둔 덕분에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해남 말을 잘 쓸 수 있다. '첫 번째 혀'는 깊이 숨겨진 채 앙상하게 말라 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내 안에는 많은 혀가 있다. 해남사람, 여성, 페미니스트, 독립영화감독인 나는 주류로 분류되는 표준어의 위세를 알기에 자주 혀를 숨긴다. 하지만 혀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가끔 용기를 내본다. 다양한 혀들이 용기를 내지 않아도 편하게 목소리를 내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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