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유공자 해남 김병조·병일 형제
한때 연좌제 고통… "진실규명 더뎌"

▲ 김병조(왼쪽), 병일 형제가 해남군민광장에 설치된 5·18표지석을 바라보고 있다.
▲ 김병조(왼쪽), 병일 형제가 해남군민광장에 설치된 5·18표지석을 바라보고 있다.
 
 

80년 당시 24살, 30살이던 형제는 공수부대 만행으로 광주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얘기를 듣고, 해남에서도 계엄군과 싸우자며 시작된 시위에 동참했다.

해남군수협에 다니던 동생 김병일(66) 씨는 당직근무 중 시위대 차량이 가두 방송을 하자 사무실을 뛰쳐나와 그대로 시위대에 합세했다. 형인 김병조(72) 씨는 시위대가 끌고 간 광주고속 버스 12대를 쫓다가 광주에서 벌어진 만행을 듣고 화가 나 역시 시위대에 합류했다.

두 형제의 아버지는 당시 광주고속 해남소장으로 본사에서는 해남에 있는 버스를 시위대 몰래 숨기라고 지시했는데 시위대가 이를 끌고 가 시위에 활용했다.

두 형제는 시위대와 함께 완도 등으로 가 광주 상황을 알렸고 대흥사에서 시위대와 함께 숙식을 하기도 했으며, 백야리에서 군부대와 시위대가 대치 상황을 벌이고 무장 헬기가 시위대 위에 출동하는 급박한 상황에도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

시위 참여 후 80년 6월 5일 시위대 검거령이 내려졌고 형제는 붙잡혀 해남경찰서와 광주 상무대 영창 등에서 70여 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김병일 씨는 결혼 3개월 차 신혼이었고 직장도 잃었다. 김병조 씨는 유치장에 갇힌 다음날 둘째가 태어났다. 유치장 생활 중 형제는 무차별 폭행과 탄압으로 각각 허리와 손가락에 큰 상처를 얻었다. 형제의 아버지는 구명운동을 벌이다 건강이 나빠져 그 해 12월 급성간암으로 숨졌다.

아픈 상처는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김병일 씨는 "직장을 새로 얻으려 해도 포고령 위반이라는 전과 기록 때문에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고, 수십 가지의 장사를 하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병조 씨는 "아이들이 당시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돌아와 다른 아이들이 '아빠 보고 공산당, 빨갱이'라고 한다고 할 때 가슴이 아팠다"며 "연좌제 피해가 자녀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에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형제는 1997년 5·18국가기념일이 제정되고 이후 5·18유공자예우법이 제정되며 제자리를 되찾게 됐고 김병일 씨는 해남5·18동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5월 항쟁이 일어난 지 42년이 됐지만 여전히 해남에서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고 있어 형제는 오늘도 아픈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

김병일 씨와 김병조 씨는 "해남에서도 향토사단에 의한 무차별 발포와 조준사격으로 7명 이상이 숨졌고 군부대에서 암매장까지 이뤄졌다는 증언이 이어졌지만 군과 정부는 2명 사망만을 인정하고 있고 암매장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며 "정확한 사망자 수와 암매장 진실, 조준사격 과정과 발포 책임자에 대한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병일 씨는 "백야리 군부대 암매장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계속 이뤄져야 하고 해남의 5월 항쟁사를 정리한 책 발간도 필요한 상황이다"며 "앞으로도 해남 5·18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를 기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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