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 판매 외길 50년… 신용으로 국내 1위 악기회사 일궜다 

거래대금·임대료·월급 지급 등 한 번도 늦은 적 없어 
19살 때 혈혈단신 상경… 연 매출 600억대 회사 성장
한 달 두세 차례 고향 찾아 "해남만큼 좋은 곳 없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는 풋내기 시골 청년은 무작정 상경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을 벗어나 서울에서 무언가 탈출구를 찾아보겠다는 막연한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다. 1960년, 그 시기는 궂으나마 일거리가 있는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가 막 시작되던 때이다.

서울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젊은이는 피아노 악기점을 운영하던 사람의 눈에 띄었다. 악기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한국악기에서 청소 등 궂은일을 도맡았다.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악기점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한국악기를 인수한 수도피아노사에서 계속 일했다. 그 사이 군에 입대해 비둘기부대로 13개월간 월남전에 참전한 뒤 전역해 회사에 복귀하고 결혼도 했다.

갓 서른이 되던 1972년 1월, 악기사에서 13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처음으로 '내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 명동의 코스모스백화점에 4평 규모의 매장을 임대해 기타와 현악기 부속품을 판매한 것이다. 백화점 이름을 따 '코스모스악기'로 지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첫 매장을 내줬던 코스모스백화점은 이미 30년 전에 자취를 감췄다. 그 사이 코스모스악기는 국내 최대 악기 판매업체로 성장했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에 지하 3층, 지상 10층짜리 사옥도 마련했다.

지난 4일 황산 연호리 자택을 찾아 코스모스악기 민명술(80) 회장을 만났다. 황산 우항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 지금의 터로 이사했다. 그는 요즘 한 달에 한두 번 고향을 찾아 2~3일간 머문다.

민 회장은 17살에 목포로 건너가 야간 중학교를 다니다 19살 되던 해 상경했다. 낮에는 악기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동대문상고(야간)에서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을 했다. 올해로 해남을 떠난 지 63년째, 인생의 대부분이 타향살이다.

"내 고향 해남처럼 살기 좋은 곳도 없습니다. 온화한 기후, 드넓은 땅, 인심 등 어느 하나 빠진 게 없어요. 서울에서 일에 빠져 살다가 20년 전부터 시간 나면 고향에 오고 있습니다." 신부나 의사 등 평소 알고 지낸 사람들을 고향으로 초청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다고 한다.

그가 평생 몸담은 악기 업계는 부침이 심하다. 유수의 악기사들이 넘어가거나 사라졌다. 코스모스악기도 국내 독점 공급선이던 일본 야마하의 직진출 선언과 IMF 등으로 몇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이를 이겨내고 국내 최대의 악기사로 우뚝 섰다. 비결을 물었다.

"고객에게 정직하고 신용으로 장사하면 됩니다. 50년간 외국의 거래업체에 대금 지급은 물론 직원 월급이나 임대료, 세금 등도 단 하루 늦은 적이 없습니다." 그의 경영철학은 욕심내지 않고 견실한 운영이다. 내 일에 충실하면서 꾸준히 한 길만을 걸어왔다고 했다. 회사는 그의 철학처럼 꾸준히 성장했다.

지난 1월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코스모스악기의 한 해 매출은 600억 원 정도이다. 세계적인 악기 전문지 '뮤직 트레이드'가 선정한 세계 악기 제조 판매사 46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국내에는 수공업은 있지만 악기 제조공장이 없다. 인건비 등으로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100여 회사에서 1만2000종의 악기와 부품을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 OEM(주문자 상표부착) 방식으로 피아노, 기타, 관악기 등을 들여오기도 한다.

코스모스악기 본사 건물은 1997년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에 세워졌다. 당시 주변에 하나도 없던 다른 악기점이 지금은 200개가 넘는다. 코스모스악기 직원은 80여 명. 계약직을 포함하면 100명 가까이 된다. 회사 관리를 맡은 직원 가운데는 해남 출신들이 유독 많다. 대리점이 300여 개에 이르고 서울과 광주, 부산, 대구, 대전에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무안에 회사 연수원도 갖추고 있다.

회사는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외아들(민관기·54)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을 했으나 가업을 잇도록 했다. 민 회장은 5~6년 전부터 경영에 손을 떼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민 회장은 인구 감소 추세에도 악기 시장의 전망을 밝게 본다. "은퇴자들이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아코디언이나 색소폰 등으로 여가생활을 하고 주부들도 피아노나 하프 등을 많이 배운다"면서 "나이 드신 분들도 몇 안 되는 손주들의 악기를 사주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고향 친구들을 가끔 만난다, 한때 서울에서 만나는 황산초등 동창들이 20~30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10명 안팎으로 줄었다.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해남 출신의 모임인 동백회도 만들어 12년째 회장을 맡고 있다. 다양한 연령층인 20명 정도의 동백회원들은 매월 정기적으로 만나오다 코로나19 여파로 다소 주춤해졌다.

민 회장은 은퇴하면 고향에 정착할 생각이다. 그러면서 경험을 토대로 더 나은 해남을 위한 주문도 했다.

"한 번은 고향 특산물을 구입했는데 불량한 게 많이 섞여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믿고 살 수 있는 특산품 판매장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해남에 많은 외지인이 찾아오는데 이들이 편안히 묵고 갈 좋은 숙박시설도 더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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