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황산면 외입리)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세월이 내 나이도 실어 갔는지 나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 세월 속에는 눈이 부실 만큼 행복한 날도 있었지만 비바람 속을 걷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고달프고 힘들었던 그때가 지금은 그리울 때도 있다.

그래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월이 거꾸로 갈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이제는 지나온 세월을 되새기기보다는 가족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일로 남은 생애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긴 여정 끝에 찾아낸 시골살이는 참 편안하고 여유롭다. 명절에 가족들을 맞기 위해 깨끗이 쓸어낸 앞마당에는 나뭇잎이 한가로이 바람에 날리고 하늘 끝과 맞닿은 넓은 들판은 배추농사가 한창이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빨갛게 익은 고추를 수확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농부들이 그 땅을 갈아엎고 배추 모종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며칠 사이에 경쟁이라도 하듯 배추의 연한 싹들이 빼곡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시골 풍경은 가까이서 보면 어느 것 하나 멈춰 있는 게 없다. 어제는 없었던 새로운 싹이 반갑게 고개를 내밀고, 새벽을 열고 나온 이슬방울은 새싹 위에서 영롱한 빛을 내고 있다. 그리고 한밤중에 내린 보슬비는 아침햇살에 밀려 소리없이 사라졌다가 한낮에 뭉게구름으로 다시 피어오른다.

한껏 몸을 불린 뭉게구름은 한밤에 빗줄기가 되어 온 땅을 적셔주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모습을 감춘다. 해안가의 특징인 밤에 내린 보슬비는 밭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보약과도 같은 존재다. 이러한 뭉게구름의 자연현상은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했다.

이렇듯 제자리에서 제 할 일을 다하며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 숨 쉬는 자연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이 들었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내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힘을 준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여유가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족들의 식사 준비와 자식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하는 주부로서 맞벌이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한가로이 앉아 책을 볼 시간도,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가끔씩 신문에 실린 내 수필이 다음날 라디오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방송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생활 패턴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게 되었고, 바빠진 생활 여정은 좋아했던 글쓰기를 자연스레 잊게 했다.

그러나, 느지막에 만난 해남 시골살이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부추겨 준다. 그 용기가 칠순을 넘긴 나이에 다시 펜을 잡을 수 있는 힘을 실어 주고 있다. 그래서 무료한 시간을 글쓰기로 달랠 수 있는 시간을 준 해남 생활이 늘그막에 찾아온 두 번째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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