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승(전 전남평생교육진흥원장)

 
 

수년 전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시작되는 기업 광고가 있었다. 치열한 경쟁사회, 급속한 변화의 시기에 1등 또는 선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세태를 담은 광고 문구였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도 있다. 결과에만 집착하는 성적 지상주의, 한국 사회의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1등은 좋은 것이고 2등 이하는 모두 패배자로 몰아가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불운이 겹치고 운명에 할퀴고 로또복권은 번번이 비켜가고, 이 사람에 속고 저 사람에 넘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좌절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인 대 만인의 경쟁에서 늘 선두권에 서지 못하고 뒤처지는 것이 우리 운명이다.'

독일의 작가 볼프 슈나이더가 쓴 '위대한 패배자'의 첫 대목이다. 이 책은 역사 속에서 좌절해간 패자들의 평범함 속 비범함, 그리고 승자가 되지 못한 인간적 고뇌를 담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실패자가 오히려 인간의 전형적 모습이고, 승자는 애초부터 지극히 소수자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마냥 좌절할 일은 아니다.

승패가 분명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에서는 더욱 그렇다. 최후의 승자인 1등은 단 한 사람 뿐이다. 당연히 우리는 승자에게 열광한다. 그러나 승자를 추앙하면서도 패자의 분전에 동정하고 감격하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0 도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올림픽은 승자의 전유물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금메달에 대한 염원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금메달 지상주의는 은메달이나 동메달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둔 선수들까지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은 많이 달랐다. 승자 뿐 아니라 패자에게도, 꼴찌에게도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럭비 선수단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 럭비가 도입된 이후 98년 만의 올림픽 첫 출전이었다. 12개 참가국 중 꼴찌인 12위. 29득점을 한 대신 210점을 실점했다. 5전 5패. 성적은 참담했다. 그래도 국민들은 환호했다. 성적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뜨거운 땀과 열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동메달 직전에 패배한 안타까운 4위가 12개 종목이나 있었다. 과거 같으면 메달 획득 직전에 실패한 좌절감에 오열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국민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여자 배구는 3, 4위전에서 완패해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국민들은 환호했다. 노메달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메달'이란 찬사도 나왔다. 높이뛰기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운 우상혁은 4위로 경기를 마치면서도 세상을 모두 가진 것 같이 환호했다.

다이빙에서 4위를 한 우하람은 노메달보다는 다이빙 본선 진출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고, 국민들은 그에게서 한국 다이빙의 미래를 보았다. 수영의 황선우도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한국 수영의 차세대 주자로서 자신을 각인시킨 당찬 10대였다.

이제 올림픽은 끝났다. 이번 올림픽에서 보여주었듯 우리 일상에서도 사회적 패자, 약자들에게 좀 더 따스한 격려와 위로, 배려를 보여주면 어떨까. 이런 관심은 패자에게 냉혹하기만 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조금씩이라도 바꾸게 될 것이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피와 땀에 젖은 과정의 아름다움 또한 평가해야 한다.

패자 부활전이 활성화된 사회, 패자들에게도 박수를 보내는 따뜻한 세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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