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일(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 신학자)

 
 

정희 언니, 그날 이후 안산(安山)은 이름처럼 더이상 편안하게 부를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이 시대 아벨의 도시가 되었어요. 자식 잃은 내 친구들은 참사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을 기억하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예배 때마다 성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눠요. 그런데 지난달 예배를 준비하던 예은 엄마가, 그 어떤 말씀도 위로가 안 된다며 성서를 읽는 대신 음악과 창(唱)을 듣자고 했어요. 그래서 성서 독서 없이 클래식 연주와 비나리 창을 들으며 묵상하는데. 문득 언니 생각이 났어요. 음악을 사랑했던 안산 시민, 우리 동네 성포동 예술인아파트 주민, 고정희 시인을요.

언니가 지금도 안산에 살고 있다면, 상한 영혼의 내 친구들과 함께 예배하며 언니의 시어(詩語)로 그들의 막힌 말문과 숨통을 틔워 주었을 거예요. 팬지꽃, 안개꽃 같던 내게 화살 같은 언어를 준 것처럼요.

시는 고통의 언어인 신음과 침묵과 항의에 가장 가까운 언어인 것 같아요. 지난봄 한 예배 때 창현 엄마가 시편 22편 14~24절을 읽고 자기의 언어로 바꾸어 쓴 시를 읽어 주었어요. "파도가 맑은 햇살을 반기며 노닐던 진도 앞바다에서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했고/그 안에 수학여행을 가던 우리 아이들이 있다는 소식에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지금까지도 삶이 통째로 흔들거려 매스껍고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고, 힘도 쎈 저들은 밥 먹듯이 거짓말을 지어냅니다. 자식 잃은 게 자랑이냐며 그만 울궈먹으라 하고 눈에 띄지도 말라고 합니다/하나님! 보고 계시죠? 삶을 통째로 내던지기 전에 이 판을 뒤엎어주십시오/그래도 살아있으라 명하시니 살아있겠습니다/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던 하나님!/당신의 구멍 난 마음에 저희 마음을 기대어봅니다. 울 힘조차 없어 눈물이 말라가는 가련한 인생에게/ 오늘도 함께 울어 줄 사람들을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들을 잃고 7년이 지났어도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은 현실을 괴로워하며 탄식하는 이 엄마의 구멍 난 마음을 언니는 어떤 시로 채워 줄 건가요? 광주학살 후 8년이 지나 열린 5공 비리 진상규명 청문회를 보며 끓어오르는 노여움에 의지하여 '우리의 봄, 서울의 봄' 연작을 썼던 언니는, 같은 분노로 '우리의 봄, 안산의 봄' 연작을 썼을 거예요.

"누구에게나/당신의 봄은 오는 것일까요/어느 불행에도 은총의/꽃은 피는 것일까요." 그렇게 함께 울어 주고 아파하며 봄날의 엄마를 위로했을 거예요. 가장 먼저 고통에게로 가서 가장 오래 머무는 당신의 시에 기대어 이 봄을 견딥니다. 이 봄을 건넙니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