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채(해남문화관광해설사)

 
 

5·18 민주화운동 하면 바로 광주를 떠올릴 겁니다. 그럼 우리 고장 해남의 5·18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때 그 시절이 지나가 버린 후로 우리는 망각 속에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저도 5·18 역사해설사 교육을 받기 전에는 큰딸을 5·18 때문에 잃어야 했고, 고교에 재학 중이던 동생이 시위대에 활동하다 죽을 것 같아 3일 만에 해남까지 걸어왔던 말을 하곤 했습니다.

해남은 광주 다음으로 처절하게 저항했습니다. 사상자도 4~7명(계엄사 발표 2명)에 달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황산면 복지계장 A씨는 시체수습 지시가 떨어져 우슬재 3구, 상등리 1구(나중에 1명 후유증 사망),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 군부대 뒤에 암매장, 군부대에 서너 구 무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해남고 3학년이던 김병용 씨의 증언에는 상등리에서 손들고 투항하는 사람도 무차별 사격을 가해서 폐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군청 앞 광장에선 21~23일 매일 2000~3000명이 모여 광주 금남로처럼 만인의 토론광장으로 해방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미안했습니다.

우리 해남 군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신군부에 저항하고, 천주교 신부님도 "우린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 가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요"라고 했습니다. 5·18동지회 해남지회장 김병일님은 해남고 학생 20여 명과 함께 옥천 용동에 숨겨진 버스, 트럭을 타고 서남부의 5·18 거점도시가 되어 이웃 강진, 완도, 진도, 목포 등지에서 가두방송하며 5·18을 알렸다고 증언했습니다. 광주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해남에서 사상자가 나왔고, 백야리 부대장은 전두환 정권으로는 유일하게 추한 훈장을 받았다는 증언에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었습니다.

해남에는 5개의 전라남도 지정 5·18 사적지가 있습니다. 동그란 모양의 돌로 된 우슬재 5·18 사적지 1호와 상등리 가기 전에 남도레미콘 앞, 두 곳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입니다. 그리고 해남군청 앞 광장, 남중학교 입구 화단, 대흥사 여관터 등 해남은 전남에서 사적지가 가장 많습니다.

또 해남군 지정 사적지도 4곳(해남교회, 우슬재 정상, 대흥사 입구, 군부대 앞)이 있습니다. 당시 해남교회 여신도회에서 주먹밥을 해 날랐고, 대흥사에서는 JC 회원들이 바자회를 열고 있을 때 버스를 타고 온 배고프고 잠잘 곳 없는 민주화 시위대에게 밥과 잠잘 여관을 주선해주었습니다. 유선장, 삼일장 등등 여관촌 주인들 모두가 유공자이고, 해남은 그렇게 용감히 함께 싸웠습니다.

총기는 더 큰 사상자를 낼 수 있다는 생각에 해남중학교에 총기를 반납하여 해남대대에 보냈던 것도 해남 군민이었습니다. 국회에서 증언하고, 고향에 죽을 때까지 오지 못한 김씨도 계십니다. 백야리 군부대 앞에서는 군부대 측과 협상이 되지 않아 돌아가는 수많은 버스에 사격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한 해남 출신 장교 두 분(민모, 홍모 씨)도 있었습니다. 해남 출신 박명성은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연극 '푸르른 날에'를 통해 2011년부터 5년 동안 매년 6주씩 5·18을 서울에 알리곤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숭고한 분들, 자신보다는 우리 해남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해남의 5·18정신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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